詩 '괴물'로 재점화한 '문단 내 성폭력'…예술과 도덕은 별개인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박상훈 기자
입력 2018-02-13 05:3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최영미 시인, '괴물'서 고은 추정 인물 묘사

  • "드디어 수면 위로" VS "예술 업적까지 깎아선 안 돼" 논쟁

고은 시인이 지난해 11월 21일 오후 서울도서관 3층 서울기록문화관에서 열린 '만인의 방' 개관식에 참석해 본인의 서재를 재현한 곳이자 '만인보' 관련 자료 전시 공간인 만인의 방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Me too/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내가 소리쳤다/"이 교활한 늙은이야!"/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 '괴물'이 SNS 상에서 다시 회자되면서 201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단 내 성폭력'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문단을 비롯한 일반 시민 대부분은 시에 나오는 성추행 의혹 당사자가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꼽히는 고은 시인이라 짐작한다. 'En선생', '노털상(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등의 표현이 그렇고, 고은 시인(1933년생)과 최 시인(1961년생)의 나이 차도 28년차로 '삼십년 선배'란 단서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시인은 시에서 언급한 사람이 고은 시인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최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의 시에 대해 "처음에 어떤 자신의 경험이나 사실에 기반해서 쓰려고 하더라도 약간 과장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 결과물로 나온 문학작품인 시는 현실과는 별개의 것이다. 현실하고 똑같이 매치시키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시에 언급된) 그는 상습범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정말 여러 차례, 제가 문단 초기에 데뷔할 때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저희가 목격했고 혹은 제가 피해를 봤다"고 주장해 시 내용이 상당부분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시사했다.

◆ "고은 시인 성추행, 문단서 쉬쉬"··· '교과서 시 삭제' 주장도

지난 6일 류근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몰랐다고?”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라며 "최영미 시인이 지난가을 모 문예지의 페미니즘 특집에 청탁받아 쓴 시가 새삼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라고 적었다.

류 시인은 “놀랍고 지겹다”면서 “19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고, 하필이면 이 와중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 터뜨리듯 물타기에 이용당하는 듯한 정황 또한 지겹고도 지겹다”고 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고 시인의 성추행이 있었지만 문단이 이를 쉬쉬했다고 비판했다. 류 시인은 “솔직히 말해보자”며 “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이어 “심지어는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대가의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하고 지지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그의 손길을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하다고 키득거린 이들은 또 얼마나 되나”라고 꼬집었다.

류 시인은 ‘문학 권력’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는 “암울했던 시대에 그(고은 시인)가 발휘했던 문학적 성취와 투쟁의 업적은 여기서 내려놓고 이야기해야겠지”라면서도 “그의 온갖 비도덕적 스캔들을 다 감싸안으며 오늘날 그를 우리나라 문학의 대표로, 한국문학의 상징으로 옹립하고 우상화한 사람들은 지금 무엇하고 있냐”고 지적했다.

또 “그들이 때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고은 시인을 떠밀어 세계인의 웃음거리로 ‘옹립’해 놓고 뒤에서 도대체 어떤 더럽고 알량한 ‘문학 권력’을 구가해 왔나”라며 “위선과 비겁은 문학의 언어가 아니다. 최영미 시인의 새삼스럽지도 않은 고발에 편승해 다시 이빨을 곤두세우고 있는 문인·언론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도 모른 척한 이들은 다 공범이고 주범”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정당 유승민 대표는 지난 8일 최 시인의 문단 내 성폭력 고발에 대해 “고은 시인의 시를 국정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연석회의에서 “현직 여검사의 고발에 이어서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했다”며 “이런 사람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다니 대한민국 수치가 될 뻔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은 시인에게 두 마디만 하겠다. 정말 추하게 늙었다”며 “권력 이용해서 성추행을 했다면 정말 찌질한(지지리도 못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 대표는 “문학계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 문인이 여성 문인이나 신인 문인에게 성추행·성폭행을 가한 것이 광범위하게 있었으며,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자들이 인간 자격이 없고 존엄이나 양식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사건은 용두사미로 끝나선 안 된다”며 “여검사 성추행 사건은 진상조사단이 공정하게 수사를 못하는만큼 상설특별검사제도의 첫 도입을 주장한다”고 했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 [사진='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


◆ "성추행 폭로로 선량한 문인들까지 매도해선 안 돼"

성추행 등 잘못된 행동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존중받아야 할 부분까지 싸잡아 한 인간을 매도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한 원로 문학평론가 김병익씨(80)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투(#MeToo) 운동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을 할퀴어 가치가 전도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뛰어난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들의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하는 사회적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예술에서 도덕적 청렴함이 반드시 플러스가 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약점, 욕망, 좌절 같은 것 때문에 예술이 오히려 깊어질 수 있다. 잘못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게 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뛰어난 예술가들에게서 많이 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투 운동과 관련해)가령 출판사 사장이 책 내준다고 꾀어 여성 문인을 어떻게 했다면 그건 문화권력을 이용한 거니까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예술가의 광기와 열망, 좌절감이나 감정의 분류(奔流)에 의해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문학까지 비난한다든가 사회적으로 공개 힐난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그(고은 시인)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며 "너무 벗겨서 드러내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그런 관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이승철 전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은 강도 높게 최영미 시인을 비판했다. 

이 전 총장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 시인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발언한 것과 관련,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 시인의 인터뷰는 한국 문단이 마치 성추행 집단으로 인식되도록 발언했기에 나는 까무라치듯 불편했다"며 "왜 그녀가 이 시점에서 자기 체험을 일반화해서 문단 전체에 만연한 이야기로 침소봉대해 쏟아내는지 조금 의아했다"고 밝혔다.

이 전 총장은 최 시인의 성격도 거론했다. 그는 "최영미 시인, 그녀는 선병질적으로 튀는 성격이었다. 매우 완강한 자존의 소유자였고, 어찌 보면 유아독존적 처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시에 대해 추호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면서 "그녀의 무례함에 대해 누구도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즈음 이 땅의 민족문학은 사실상 최영미 현상으로 인하여 결딴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최 시인의 시집 '돼지들'에 수많은 문화계·문학계 인사들이 그녀에게 했다는 성적 추행이 나온다면서 "지독한 남성혐오에 가까운 트라우마일 수 있다"며 "왜 그녀는 그 시집에 등장한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일부러 만나 그런 사건을 만들어야 했는가. 어찌보면 난 그게 의문스러웠다"고 적었다. 

이 전 총장은 "물론 En 시인의 기행에 대해서 숱한 얘기를 들은 적 있지만 먼먼 소싯적 얘기를 현재 진행형으로 매도하는 건 조금 납득할 수 없다"면서 "미투 투사들에 의해 다수의 선량한 문인들이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최영미 시인[사진=연합뉴스]


◆ "일상의 민주주의 위해 싸우는 목소리가 페미니즘"

한편 최 시인의 ‘괴물’을 게재한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원고 청탁 과정과 ‘괴물’ 파문, ‘페미니즘과 젠더’ 특집에 관한 이야기를 올렸다.

전 편집장은 “최영미 선생님께 청탁한 것은 지난해 9월 10일의 일이었고, 원고 청탁서를 보낼 때 (필자 전원에게) 특집이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라는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그는 최 시인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괴물’을 ‘황해문화’에 보낼 때 게재 여부를 반신반의했다고 한 것에 대해 "최영미 선생의 작품을 받았을 때, 이것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게재 여부를 전체 편집위원이 참여한 편집회의에 안건으로 올렸고, 작품을 읽은 편집위원들은 이번 호에서 ‘황해문화’가 지향하는 바는 물론, 그간 ‘황해문화’가 걸어온 길에 비추어 이 작품을 우리가 게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만장일치로 게재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전 편집장은 “(2017년 촛불 이후) 비어 있는, 미처 채우지 못한 ‘일상의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목소리가 곧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이란 거대한 이슈에 묻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비민주주의, 권위주의 행태와 싸우는 투쟁이 페미니즘”이라고 했다.

또 전 편집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약한 자들이 누구인지 한 번 살펴보라. 어째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여성의 목소리로 발화하는지 한 번 살펴보라”고 덧붙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