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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80]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는 어떻게 등장하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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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2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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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역사에 큰 흔적 남긴 준가르
이제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Djungar:準噶爾)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자. 준가르가 존재했던 시기는 17세기와 18세기로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몽골과 중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사진 = 신강지역 일몰]

오늘날 근처 많은 지역의 운명이 준가르의 활약과 상당 부분 연결돼 있다. 몽골의 운명이 그렇고 티베트의 운명이 그렇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의 신강 지역의 운명이 정해진 것도 준가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사진 = 홈스골지역 차가누르 마을]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준가르는 곳곳에 그들 존재의 흔적을 남겨 놓은 셈이다.

▶나이만의 후예 준가르

[사진 = 준가르 분지]

준가르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초다. 하지만 이 준가르라는 부족이 땅에서 솟은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면 그 뿌리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 준가르는 오이라트의 4개 주요 부족가운데 초로스와 도르베트에서 나와 준가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준가르라는 말은 몽골어로 왼쪽, 즉 좌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무엇의 좌익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들이 도르베트 진영에서 왼쪽 지역에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초로스와 도르베트 부족 모두 몽골의 나이만 부족에서 파생됐다.

[사진 = 준가르 분지 지나는 열차]

과거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몽골의 서북쪽에 자리하면서 칭기스칸과 마지막까지 대적했던 나이만 부족의 후예들이 초로스와 도르베트 부족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때 몽골 고원을 장악했던 토곤과 에센부자는 바로 이들의 맥을 이어 온 지도자 가운데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다.

▶준가르 지역에 정착한 오이라트
17세기 초 할하 우익의 알탄 칸이 오이라트를 장악했을 때 이들은 몽골의 서북지방으로 밀려나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일부는 북쪽 시베리아 지방으로 흘러들어 가기도 하고 일부는 계속 서쪽으로 옮겨가 카자흐인들과 섞이기도 했다.
 

[사진 = 타르바가타이 위치도]

그러나 대부분은 일리와 이밀 그리고 타르바가타이 지역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 바로 이 지역이 지금도 준가르 분지라고 불리는 곳과 그 근처 지역이다.

▶준가르의 본거지 타르바가타이

[사진 = 카자흐 초원 양떼]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주도(州都) 우루무치(Urumugi)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넓은 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왼쪽으로 뻗어 있는 눈 덮인 천산 끼고 달려가는 평원은 수백 Km 이어져 카자흐스탄 국경에 이른다. 과거에 목초지였던 평원의 상당 부분은 지금 농지로 바뀌어져 있다.

그 평원은 북쪽으로 더욱 넓게 펼쳐지면서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평선으로 이어진다. 우루무치의 북쪽과 서쪽에 펼쳐져 있는 이 넓은 분지의 이름은 준가르다. 그 곳은 과거 칭기스칸 군대의 호레즘 원정로이기도 했다. 바로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리어지는 준가르 제국이 터를 잡았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준가르 분지의 북쪽 끝 지역에 타르바가타이(Tarbagatai)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카자흐스탄의 영토로 들어가 있는 이 산악 지역이 바로 과거 준가르 제국이 일어섰던 곳이다.

▶준가르 등장시킨 바아토르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초로스의 수령은 하라후루였다. 하라후루는 이미 한번 등장했었다. 할하의 알탄 칸과 결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처자를 잃었던 인물이다. 그는 1,634년에 사망하고 아들인 바아토르 홍타이지가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 받았다.

바아토르 홍타이지는 호쇼트부 구시 칸의 청해 원정 때 동참해서 달라이 라마 5세로부터 홍타이지 칭호를 얻은 바로 그 인물이다. 아버지가 자리를 잡은 타라바가타이산 근처에다 자신의 부족들을 정착시키려 했던 그는 근처 쿠박사리라는 곳에 돌로 된 정착도시를 건설했다.
 

[사진 = 준가르지역 목화밭]

아마 타라바가타이산 남쪽의 에밀강 근처지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그 근처에 오이라트 최초로 티베트 불교 사원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 곳에 거주했던 사람은 바아토르와 그 가족 그리고 추종자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이들은 초로스라는 이름대신 준가르로 불리기 시작했다.

[표 = 준가르 지도자 계보]

▶오이라트 맹주로 떠오른 바아토르

[사진 = 준가르 분지 농민들]

바아토르는 주로 그 곳에 거주하면서 동쪽으로 홉드(Kovd), 남서쪽으로 일리지방까지 이동해 다니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준가르 분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자이산호, 남서쪽은 지금의 키르기즈스탄에 있는 추강, 남쪽은 천산산맥까지가 준가르의 영토였던 것이다.
 

[사진 = 사이람 호수(준가르 분지 서쪽 끝)]

바아토르는 나름대로의 법률을 제정하고 농경과 교역도 장려하면서 하나의 국가로서의 모양을 갖춰 갔다. 특히 바아토르는 러시아와의 교역을 장려해 자주 사절단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래서 바아토르의 이름은 러시아 측 기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1,636년 구시 칸의 청해 원정에 참가했던 바아토르는 구시 칸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고향 땅인 준가리아로 돌아갔다. 오이라트 본거지에서 바아토르는 자연스럽게 맹주의 자리로 부상됐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오이라트 지역에 남아서 그와 겨눌만한 유력자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르구트는 볼가강 쪽으로 이동해 가고 없었고 동쪽의 호쇼트부는 청해로 이주해 가버렸다. 게다가 도르베트부의 지도자였던 다라이 타이시까지 1,637년 숨지자 그의 입지가 강화된 것은 당연했다.

▶오이라트 최초승려 자야 판디타
오이라트에서 최초로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된 사람으로 자야 판디트(Jaya Pandit)라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22년 간 티베트에서 수업한 뒤 1,639년 오이라트 지역으로 돌아와 포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가축을 끌고 다니면서 이동 게르 사원을 운영하는 형식으로 티베트 불교를 널리 알리고 여기 저기 초대돼 법회를 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할하 지역에서 포교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645년에는 볼가강변의 토르구트 진영으로까지 초대돼 그 곳에서 법회를 열고 그 대가로 많은 말을 기증 받기도 했다.

[사진 = 준가르 지역의 취재차량]

또 준가르의 본거지인 타르바가타이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도 오이라트의 정세에 밝았다.

▶토도 문자 만든 자야 판디타
준가르에 대한 상황도 그의 동생인 라트나바트라가 형의 행적을 기록한 ‘자야 판디타전’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오이라트어로 쓰여 진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오이라트어도 바로 자야 판디트가 만들어낸 문자다.
 

[사진 = 준가르지역 몽골 오보 ]

1,648년 자야 판디트는 아래로 쓰는(縱書) 전통 몽골 문자를 개량한 오이라트어를 만들어 냈다. 7개의 문자를 새로 만들어 모음 표시를 새롭게 첨가함으로써 몽골어의 발음을 보다 명확히 했기 때문에 이를 토도(Todo)문자, 즉 명확한 문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사진 = 몽골 문자]

오이라트어는 현재 몽골어의 한 갈래로 분류된다. 몽골의 할하 방언과 발음과 문법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서로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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