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고락(苦樂)의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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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8-02-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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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늘 혼자였다. 나 자신과의 경쟁이었다. 코트에 서면, 일순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나와 공만 남는다.” 테니스 여제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의 술회이다. 그녀는 1975년부터 2006년까지 167차례 우승했다. 윔블던배를 20회 차지했으며, 그랜드슬램도 59차례 정상에 올랐다.

지독한 연습 벌레였다. “공은 절대 똑같은 모양으로 네트를 넘어오지 않는다.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그렇다. 상대가 있는 경기에서 완벽하게 동일한 상황은 거듭되지 않는다. 벽 치기는 필요 없다. 다양한 코스와 구질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그녀가 US오픈 혼합복식 우승을 끝으로 은퇴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에스터 베르기어도 테니스 선수이다. 그녀의 우승 기록은 나브라틸로바를 압도한다. 2000~2013년 단식과 복식을 합쳐 1148회 우승했다. 여기엔 470경기 연승도 포함돼 있다. 다만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라켓을 휘둘렀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재활센터에서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기보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8살에 하반신마비가 왔다. 처음엔 절망했지만, 당당한 삶을 향한 갈망을 바탕으로 희망을 일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진정한 스포츠 스타일 것이다.

사실 스포츠는 고통의 산물이다. 영웅들을 추모하면서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스포츠를 고대 그리스에서는 ‘고통(agon)’이라 칭했다. 그랬던 것이 로마시대에는 ‘슬픔을 해소하다(deportare)’로, 영어에선 놀이와 즐거움이란 ‘디스포트(disport)’로 변화한다(잘난 척 영어잡학사전, 김대웅). ‘하는’ 스포츠에서 ‘즐기는’ 스포츠로 변질되면서 본디의 의의도 변화한 것이다.

껍질을 깨는 것은 삶을 향한 고통의 여정이다. 한계를 깨는 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올림픽은 그래서 인간과 신의 구역을 조정하는 무대이다. 0.01초라도 빠르게, 0.01m라도 멀리 달리고 뛰는 이유이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신의 영역을 가린 커튼이 살짝 열렸다. 14살 나디아 코마네치가 이단평행봉을 날아 착지했을 때, 전광판은 1.00을 나타냈다. 당시 점수판으로는 9.99까지만 표시할 수 있었다. 10.00은 신의 영역이어서 소수점 앞에 두 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코마네치는 신의 점수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신문 제목은 '코마네치, 컴퓨터를 고장내다'였다.

“나는 완벽하지도 않고, 신체 조건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평균대에서 세 번 떨어진 적도 있다.” 그녀 역시 연습 벌레였다. “누구나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스모 선수든 발레리나이든 마찬가지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싶지 않으면 관중석에서 구경하면 된다.” 그녀는 “금, 은, 동이 아니라 매 순간 승리하는 것”이라 했다. 비록 신체적으로 뛰어난 조건은 아니었지만, 최고를 향한 비교할 수 없는 열정이 있었다. 정상에 오르기보다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다. 1980년 반쪽짜리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이단 평행봉에서 손이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고도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허들의 명인’ 에드윈 모지스도 노력의 산물이다. “나는 공부를 못한다는 것을 12살 때 알았다. 잘하는 것은 달리기였다. 특히 장애물을 넘는 게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노력만으로 0.2~0.3초 단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기록을 세우고 나면 0.01초를 단축하는 것도 엄청난 장애물이다. 

그는 트랙을 연구했다. 주로 폭은 1.2m이다. 시계방향 반대이니까 왼쪽 선을 따라 400m를 돌면 오른쪽 선보다 2.4m 짧다. 그래서 허들을 왼쪽으로 넘고 왼발로 착지하도록 보폭을 조절했다. 그는 1976년부터 1991년까지 1등이었다. 이듬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케빈 영이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역시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그만큼 인간의 영역을 신 쪽으로 확장한 것이다.

인간의 맨 앞에 섰던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노력과 열정도 중요하겠지만, 역경과 슬럼프에 대처하는 능력 아닐까. 불안감과 부담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여기에 앞선 자의 ‘고독한 자유’가 결정된다. ‘황금 곰’ 잭 니클라우스는 “18번 홀의 부담감을 느끼기 위해 골프 코스에 선다”고 말했다. 고통을 넘어 즐기는 것이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이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신문 제목으로 화제가 됐던 이상화가 ‘예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0.39초 차였다. 눈물을 흘렸고, 미소를 지었다. 활짝 핀 꽃은 미구에 시든다. 이상화 꽃이 진 자리에 씨앗이 떨어지고, 머지않아 새싹이 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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