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생활을 하던 혜원은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온다. 시험, 연애, 취업 등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그는 고향에서 오랜 친구 재하, 은숙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 끼, 한 끼를 지어먹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씩 성장하고 자라난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감독 임순례)는 배우 김태리(27)의 민낯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다. 귀족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에게 고용돼 아가씨의 저택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 소녀(영화 ‘아가씨’)를 지나, 87학번 대학 신입생(영화 ‘1987’)에 이르기까지 작품이나 캐릭터에 자신을 맞추었던 김태리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감독님과 첫 미팅도 그랬어요. 작품 이야기, 시나리오 이야기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나누었죠. 감독님이 ‘저’를 궁금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탈탈 털리고 며칠 뒤에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죠.”
김태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그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 일본 영화 또한 큰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임순례 감독은 일본 정서로 그득한 원작을 군데군데 뜯고 꿰매 한국적 이야기, 캐릭터, 정서로 채우고자 했다. 김태리와의 첫 만남에서 시나리오보다 그의 민낯을 들여다보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원작에 대해 집중하기보다는 한국적으로 각색된 시나리오에 더 초점을 맞췄어요. 혜원이라는 캐릭터 역시 제 모습과 닮은 부분부터 시작해나갔고요. 그러다 보니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연기도 기존 작품들과 달리 했었던 것 같고요. 소속사 분들이 영화를 보고 그러셨대요. ‘그냥 태리네!’라고요.”
영화는 기존 한국영화들과는 달리 어떤 관계,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특히 혜원과 엄마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에 대해 “캐릭터에 생략된 많은 것들을 어떻게 채워나갔는지” 묻자, 김태리는 “혜원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명확하게 상상했다”고 답했다.
“가장 중요한 건 ‘혜원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였어요. 시나리오에 나온 부분들을 더 명확하게 상상하곤 했죠. 예컨대 혜원이 수능을 마친 뒤 눈 내린 산속을 걷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시에 사는 혜원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하곤 했어요. 특히 엄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요. 처음에는 (엄마가 떠나버린 것에 관해) 화가 많이 났을 것 같아요. 친구들과 다른 나에 대한 쓸쓸함도 컸을 것 같고요.”
김태리는 혜원의 속내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자신과 가장 닮은 부분을 맞춰보고 또 헤아리면서 혜원의 삶 속으로 걸어갔다.
“개인적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이 남들보다 특별하거든요. 그래서 혜원이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다르지만 동질감이 든다고 할까? 문소리 선배님과 호흡을 맞출 때 더욱 특별하고 행복했었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인복(人福)’이 많은 배우. 함께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도 그렇지만 유난히 쟁쟁한 감독들과 작품을 만들어왔다. 박찬욱 감독부터 장준환 감독, 임순례 감독에 이르기까지. 배우라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유명 감독들과 작품을 함께해온 것이다. 이에 김태리는 “너무도 행운인 것 같고, 기적이라고 해도 약하지 않을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 작업을 한 것 같아요. 감독님들을 통해 저도 성장할 수 있었고요. ‘아가씨’를 찍을 땐, 감독님이 저를 끌어주는 게 중요했어요. 박찬욱 감독님처럼 완벽한 시나리오, 콘티 속에서 연기하는 것이 좋았죠. 그러다 ‘1987’ 장준환 감독님을 만났고 즉석에서 ‘어떤 게 더 효과적인가’ 상의하는 법을 배웠어요.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님은 더했죠! 시나리오랑 달라지고 대사가 바뀌고, 생기기도 하고요. 굉장히 당황스러웠는데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매 작품 달랐다. 장르부터 촬영 방식, 감독님의 성향까지 무수한 변화를 겪어왔다. 이에 “어떤 방식이 가장 잘 맞았느냐”고 묻자, 그는 “시기와 딱 맞아떨어졌다”고 답했다.
“제가 필요했던 감독님, 작품과 잘 만난 것 같아요. 그 시기와 아주 딱 맞아떨어졌죠. 박찬욱 감독님을 만났을 땐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나, 하나 섬세하게 잡아주는 감독님이 필요했고요 장준환 감독님은 감정을 자유롭게 조율하는 걸 알려주셨어요. 임순례 감독님은 편안하게, 영화에 걸맞게 숨 쉬는 법을 알려주셨죠.”
이는 곧 ‘배우’ 김태리의 성장과도 같았다. 여러 배우와 함께 어울리고, 맡은 바 임무를 해내던 그가 한 작품을 끌어가는 어엿한 주연 배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과 같았다. 작품을 책임져야 하는 ‘주연 배우’가 된 것에 관한 생각은 어땠을까. 그에게 주인공으로서의 부담감에 관해 질문했다.
“처음엔 부담감이 없었어요. 문소리 선배님도 있고, 임순례 감독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배우가 적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의 전 회차에 출연했으니까요. 하하하. 제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골골거리면, 영화 전체에 피해를 주는 일이 생기니까. 더 에너지 있게, 생기 있게 힘을 내자고 생각했어요.”
김태리의 변화, 그리고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스크린에 이어 브라운관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는 올여름 방송될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주인공을 맡아 대중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처음이라서 ‘이게 잘 되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어요. 김은숙 작가님, 이응복 감독님을 비롯해 배우 선배님들을 믿으려고요. 음, 드라마를 찍으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가장 크게 깨달은 건 ‘힘을 빼는’ 방법이에요. 영화는 두 시간 동안 인물을 임팩트 있게 보여주다 보니 한 장면, 한 장면 모든 신경을 기울여서 연기하거든요? 그런데 드라마는 모든 장면에서 힘을 주다 보면 보는 이도, 연기하는 이도 지치게 되더라고요. 편안하게 촬영을 하면서 많은 회차를 거쳐 자연스럽게 인물을 구축하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잘 짜인 시나리오에서 즉흥적인 시나리오,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으로…. 일련의 변화를 겪은 김태리는 자신의 ‘내면’ 역시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제가 처음 연기를 시작한 건, 단지 ‘재미있어서’였어요. 즐거움과 성취감을 얻는 게 컸죠. ‘이렇게 재밌는 연기를 직업으로 삼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재미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부담을 느끼는 때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책임감이라고 할까요? 저를 사랑해주는 팬분들, 감독님, 작품을 위해 열심히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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