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칼럼] 젠더 감수성 높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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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입력 2018-03-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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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칼럼]

 

[사진=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고은, 이윤택, 오태석, 김석만, 윤호진, 한명구, 하용부, 조증윤, 조근현, 조민기, 조재현, 오달수, 최일화, 배병우, 박재동 그리고 단초가 된 안태근. 제각기 자기 분야에서 원로 혹은 대부, 적어도 중견 소리를 듣던 이들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기세등등하던 이들이 급전직하한 것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서지현 검사 폭로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이 동안 미투운동(#Me Too·나도 당했다)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문화예술계에서 시작해 학계, 의료계, 기업, 언론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이 들춰지고 있는 중이다. 고통을 오래 묵히고 삭혔던 피해 여성들이 입을 열어 ‘침묵을 깬 사람들(The Silence Breaker)’ 대열에 속속 합류했기 때문이다. 미투를 지지하는 ‘위드유(#With You)’ 동참자도 늘어나고 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둔 한국 사회에는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큰 변화의 물결이 치고 있다. 아니 이제는 되돌아가서도 안 되는 불가역이 되어야 한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전직 국회의원은 “수컷이 많은 씨를 심으려 하는 것은 본능”이라고 버젓이 방송에서 말하고, 어떤 가해자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명백한 범죄를 ‘나쁜 관습’이라고 변명하는 게 현실이다. 또 다른 가해자는 “가슴으로 연기하라며 툭 친 걸 가슴을 만졌다고 음해한다”니, 세상에 그 가슴이 그 가슴이냐 말이다. 이 땅에서 50년을 살아온 여성으로서 “한국 여자 90% 이상이 성추행, 성희롱 당한 경험이 있다”는 한 배우의 말이 크게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 지경이니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바뀔 때까지 성폭력에 관한 한 사회가 리셋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미투가 성평등 운동으로 진화하기 위해 차근차근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시스템화하고 정책화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첫걸음은 피해자가 공적인 상담·신고체계를 통해 증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을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를 열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가 ‘미투지원본부’를 발족한다니 사회적 플랫폼은 곧 만들어질 모양이다. 법적 측면의 보완도 필요하다. 형법 307조(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와 정보통신망법 70조 등을 손질해 2차 피해를 막거나, 남인순 의원이 대표 발의하려는 ‘성별에 의한 차별·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같은 사각지대의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안도 필요할 것이다. 미투 운동에서 거론된 가해행위를 법률상 새로운 범죄 행위로 구성하는 ‘미투지원법령’도 여협의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아예 스웨덴 등 성평등 선진국처럼 헌법에 ‘실질적 성평등’ 문구를 넣고 국가운영기조에도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제도를 손질하고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더 어려운 것은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미투 사례를 보면 대부분 ‘권력형 성범죄'로 포괄된다. 가해자는 조직의 정점에 있거나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이다. 남성 중심 조직문화와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가 권력형 성범죄가 창궐하는 배경인 것이다. 이런 사회존립 방식에서는 여성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고, 배제기제 중 하나가 성폭력이므로 본질은 젠더 권력의 문제로 치환된다. 결국 권력형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1000년 이상 강요되어 온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1000년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한쪽에선 완강히 버티고 유지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부수고 깨뜨리려는 격렬한 시도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미투운동이 그 예다. 이제 미투운동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성찰과 혁신을 이끄는 기제로 작동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 가해자는 아니었더라도 동조자나 방관자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사상가이자 정치인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이런 말을 했다. "악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개개인, 나아가 사회의 젠더 감수성 지수를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바른 성 인지는 여성과 남성의 사회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삶의 현실을 이해하고, 이로 인한 차이를 인식하며, 성별 불평등에 대한 민감성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관심과 태도다. 성폭력과 같은, 여성에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을 젠더 감수성이 낮은 남성은 별것 아닌 일로 왕왕 치부해 버린다. 성범죄를 막고 단죄해야 할 입법과 행정, 사법부라는 공적 영역에 있는 사람이 젠더 감수성이 낮다면 그것은 훨씬 파괴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교사와 학부모같이 미래 세대의 교육을 책임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여성가족부의 성평등 문화 확산 태스크포스가 지난 2월 성평등 문화 확산을 위해 교육과 미디어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젠더의 관점에서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인 ‘성 인지적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한국사회의 낮은 젠더 감수성이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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