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 봄이 바닥을 기어오는지 으스스하게 추웠다.
1933년 2월27일. 오후 3시45분. 하얼빈 도외정양가(道外正陽街) 거리. 삐이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순간 급박하게 뛰어가는 발소리 뒤로 일제 경찰 10여 명이 추격하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섰을 때 저쪽에서 다시 튀어나오는 5, 6명의 경찰. 두어 발의 총성이 울렸다. 경찰들이 총을 겨누며 포위망을 좁혀오는 가운데, 권총을 든 남루한 행색의 사람이 쓰러졌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던 그는 여인이었다. 쌍꺼풀 없는 강인한 얼굴의 조선 여인. 권총을 빼앗긴 뒤 경찰들에 의해 양팔이 뒤로 꺾였다. 그녀의 품에선 비수(匕首) 하나가 나왔다. 옷 속엔 피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오래 전 남편이 전사할 때 입었던 의병군복을 피얼룩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 만주국의 일제 총수, 부토는 내가 처리한다
대체 그녀는 왜 걸인차림으로 하얼빈 거리를 걷고 있었을까. 일제는 어떻게 이 여인을 체포했을까.
우선 시계를 한 달 여 거꾸로 돌려 그해 1월초로 가보자. 남자현은 부하 정춘봉(鄭春奉)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제가 허수아비 만주 정부를 세우고 중국 깊숙이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죽일 놈들. 저들이 저렇게 날뛰는 것을 대한독립군들이 지켜만 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저들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줘야겠다. 일제의 심장에 일격을 가할 방도가 없겠는가.”
“있긴 있습니다만...”
“말해보라.”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요즘 경계가 워낙 삼엄해져서... 만주에서 일제 최고인물인 무등신의(武藤信義, 부토 노부유시) 전권대사를 처단하는 겁니다.”
“그놈에게 접근하는 일이 쉽지 않을 듯 한데...”
“예. 그렇지요. 한데 오는 3월1일이 기회입니다. 이 날은 우리 대한이 만세운동을 벌인지 14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지만, 만주국 수립 첫돌이기도 합니다. 이날 이들은 신경(新京)에서 거창한 기념식을 벌이기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거사를 펼치면 역사의 방향을 돌릴 수 있지 않을지요.”
“음...무기 조달은 어떤가. 가능하겠느냐?”
“잘 알고 지내는 중국인 몇 명을 통하면 폭탄까지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내 나이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이니 두려움이 없다. 부토를 처형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魚肉)으로 갈기갈기 날리리라.”
동지였던 일송 김동삼은 2년전(1931년) 체포되어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어 있었고 정신적 지주이던 석주 이상룡은 1년전 여름에 눈을 감았으며 종교적인 지우(知友)이던 해석(海石) 손정도목사도 2년전 돌아간 터라, 그녀에게 만주는 이제 쓸쓸한 전장(戰場)이었다.
# 배신이 있었다...무기를 접수하다 체포된 그녀
1933년 1월20일 이들은 몇 명의 조선이 동지를 규합한 뒤 중국인들과 함께 다시 모였고 권총 한 자루와 탄환, 폭탄 2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무기를 건네받는 날은 27일 오후 4시였다. 남강 길림가 4호 마기원(馬技遠) 집 문앞에서 붉은 천이 펄럭이면 그때 무기가 든 과일상자를 옮기기로 했다. 기념식장으로 침투하고 거사를 벌이는 것은 남자현 혼자서 하기로 했다.
일정이 정해지고 난 뒤 그녀는 도외구도가에 있는 무송도사진관에 들른다. 22일이었다. 최후를 예감했기에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을까. 권수승이라는 동지에게서 대양3원을 빌려 사진 찍는 비용을 치렀다. 그녀는 이 사진을 혈육이 챙기기를 바랐을까. 하지만 그럴 경황이 없었다. 만주국의 ‘빅맨’을 저격하는 임무를 앞두고 비장한 심경으로 찍었을 사진은 지금 어디로 가있을까.
23일 오전 10시에 다시 거사 장소를 확인했다. 27일 오후3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거지로 변장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조심스럽게 길림가 4호로 무기를 받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일제 경찰이 덮친 것은 그때였다. 거사를 논의했던 사람 중에 조선인 밀정이 끼어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함께 일을 추진했던 손보현이 봉천에서 먼저 체포되었지만 남자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하얼빈 감옥에 투옥된다. 이상국(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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