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경평축구 때 2만명 구름관중 모였다…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축구'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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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훈 기자
입력 2018-03-0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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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항~현재 서울 속 축구역사 소개

1935년 4월 13일 경평전(경성 대 평양) 선수 사진.[사진=서울역사편찬원 제공]


# 일제강점기 당시 축구장은 식민지 설움을 쏟아내는 격정의 장소였다. '경성-평양 축구대항전'은 1929년 10월 8일 처음 개최됐다. 2년에 걸쳐 순조롭게 이어졌고 잠시 중단됐다가 1933년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3회 대회가 열렸다. 경성 선수들로서는 첫 평양 원정경기였다. 당시 무려 2만여 명의 관중이 모였다.

서울역사편찬원은 1876년 개항 이후 현재까지 서울이란 공간 안에서 축구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쉽고 재미있게 서술한 '서울의 축구'를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스포츠 평론가이자 축구 전문가로 잘 알려진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가 저술했다.

내용은 △서울, 축구의 기원 △일제강점기 서울의 축구문화 △서울의 학원축구 △서울의 실업축구 △서울의 프로축구 △서울 축구, 그 장소성의 의미들 등 모두 6장으로 구성됐다. 다양한 참고 사진도 담겼다.

책을 보면 '제1회 경성‧평양 축구 대항전'은 당시 조선일보사 운동부 기자 이원용과 경성의 변호사 최정연이 두 도시 축구단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 "경평전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한 게 발단이 됐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과거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한 불교청년회를 주축으로 한 조선축구단, 신생 경성축구단이 생겨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평양에서는 평양축구단이 창단했다.

당시 '경평전'은 경성-평양 축구팀 간 라이벌전이었다. 유럽 축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홈 앤 어웨이'를 전제로 한 더비전 방식으로 치러졌다.

서울시청 축구팀은 1946년 창단해 6‧25전쟁으로 해체됐다. 1976년 박종환 감독을 중심으로 재창단해 최고의 실업팀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우철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익숙하고 가볍게만 즐겨왔던 축구가 서울이란 공간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 재미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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