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중에선 유일한 독립유공자 2등훈장
1962년 3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윤보선대통령은 남자현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2등훈장)을 수여한다. 복장은 모두 58명이 받았으며 홍범도, 김동삼, 이봉창, 나석주, 이동녕, 박은식, 노백린, 양기탁, 신채호, 지청천, 오세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중에는 남자현이 유일했으며 최고의 훈장이었다. 3.1 만세 운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관순 열사보다 독립운동 공로를 더 높이 인정받은 것이기도 하다.
1934년, 남자현 사후 1년 뒤 교하의 김성삼의 집에서 1주기 추도회가 열렸다. 당시 동아일보(1934년 9월5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도만(到滿) 십여 년에 쓰러져가는 조선민족사회를 위해 일향 분투하던 고 남자현여사는 작년 가을 하르빈(하얼빈)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옥중고초의 여독으로 마침내 세상을 떠난 바 지난 8월 22일은 동 여사의 1주기이므로 현재 교하에 거주하는 김성삼씨 자택에서 1주년 추도회를 거행하였다더라.”
# 해방 이듬해 애국부인회가 인사동서 남자현 추모행사
해방 이후인 1946년 8월22일 남자현을 기리는 행사가 벌어졌다. 독립촉성 애국부인회 주최의 추념회였다. 13년전 17일 단식으로 옥사한 남자현 여사를 추념한다는 취지를 내걸고 오후 2시부터 서울 인사동 승동예배당에서 벌어진 기념행사였다. 남자현의 기억은 당시 여성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자란 구여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인상적인 궤적은 그러나 그 이후 너무도 까마득히 잊힌 감이 있다.
#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하얼빈 '남자현 묘소'
남자현의 묘소는 어떻게 되었을까. 1933년 10월12일 오후 4시 하얼빈 외국인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남자현 묘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988년 여름 아들 김성남은 손자 김시련의 손을 잡고 독립운동 동지들과 함께 남자현의 묘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한 장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 묘지는 평지로 바뀌어져 있었다.
김시련은 그날 “할머니의 묘지는 찾을 수 없지만 할머니가 싸우다 세상을 뜬 하얼빈을 보고 가는 것만 해도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 묘소는 어디로 갔을까. 1958년 하얼빈시 도시건설 대약진 때 시내에 있던 묘지가 모두 20km 떨어진 황산묘지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2005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강위원교수는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조사했는데, 남자현여사의 묘소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중국은 동대직가 외국인 묘지를 옮기고 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연고가 불분명한 묘지는 모두 없애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황산묘지에는 남자현의 묘소가 없었다.
1967년 국립묘지로 이장 작업을 할 때 그녀는 가묘로 묻힐 수 밖에 없었다.(현재 국립묘지의 남자현 묘소는 안타깝게도 주인공이 묻혀 있지 않는 빈 묘이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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