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6] 종교열풍이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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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3-20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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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과열 승려지원 제지에 나선 淸

[사진 = 몽골 승려의 오보제 행사 주관]

승려가 되겠다는 사람이 폭주하면서 그 열풍이 몽골 초원을 휩쓸었다. 승려가 되기를 독려했던 청나라 정부가 이제는 그 열풍을 잠재우고 과열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서야할 상황이 됐다. 너무 많은 남성들이 사원으로 몰리다 보니 정권 유지를 위해 필요한 병력 차출마저 어려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는 도첩 발급 요건을 강화해 열풍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자 도첩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티베트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몽골의 관청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이들의 출가를 묵시적으로 허용했다.

▶사원마다 넘쳐나는 승려

[사진 = 울란바토르의 불상]

그래서 사원마다 승려들이 넘쳐났다. 후레(庫倫: 지금의 울란바토르에 있었던 이동 대승원)의 간단사나 투메트 지역의 서응사(瑞應寺) 같은 곳은 승려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다. 작은 사원의 경우에도 승려가 수십 명 이상에 이르렀다.

[사진 = 간단사 법당 내부]

툴 강변을 따라 이동하고 있던 이동 대승원 후레는 1,778년부터 간단사가 있는 지금의 울란바토르 땅에 고정됐다. 울란바토르가 몽골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 것이 지금 몽골의 수도로 발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귀족자제 출가 막아

[사진 = 보타종승지묘 관광객]

청나라가 승려가 되는 길을 막은 사례는 또 있었다. 귀족의 자제들이 출가하는 것을 적극 막은 것이 그 것이다. 청조는 처음에는 귀족 자제들의 출가를 적극 권장했다. 청나라는 몽골의 귀족들과 정치적 연계를 맺어가면서 정권을 안정 시키려했다. 귀족 자제가 승려가 돼 교권을 장악하게 되면 통제가 훨씬 수월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사진 = 티베트 불교 승려]

그런데 귀족의 자제 출신의 승려가 몽골인들의 구심점으로 떠오르자 걱정거리가 생겼다. 이제는 티베트 불교를 지렛대로 삼아 귀족 출신 승려들을 중심으로 몽골인들이 뭉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그런 우려 때문에 거꾸로 이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막고 나선 것이다.

▶젭춘담바 중심 단합 견제

[사진 = 티베트 불교 사원 안원사(安遠寺)(열하)]

청나라가 가장 주목한 몽골 티베트 불교의 중심인물은 젭춘담바였다. 갈단의 공격을 피해 카라코룸의 에르데니 주 사원에서 달아나 강희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던 젭춘담바 쿠툭투, 즉 젭춘담바 1세를 기억할 것이다. 할하 몽골이 청나라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됐던 그 사건을 계기로 강희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거의 매년 북경과 열하를 오가면서 강희제와 함께 지냈다.

1,718년 강희제는 그를 할하의 황교파의 교주로 임명했다. 강희제는 할하 통치를 위해 티베트 불교 고승인 그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몽골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청나라가 그 지위를 보증한 것이다. 청나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젭춘담바 1세는 준가르와의 전투에서 청나라가 승리하도록 기원하는 등 강희제의 기대에 부응하는 활동을 했다.
 

[사진 = 티베트 불교 신도 참배]

강희제가 숨진 이듬해인 1,723년 젭춘담바는 90세로 입적했다. 그의 형인 투시에트 칸의 증손이 젭춘담바 1세의 전생으로 인정돼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젭춘담바 쿠툭투 2세다.
그런데 몽골 황교의 교주인 젭춘담바는 몽골의 교권과 함께 속세의 권한까지 장악하면서 이전의 대칸과 비슷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청나라는 이 젭춘담바와 몽골의 귀족들이 계속 교권을 장악할 경우 통일세력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그래서 귀족 자제의 출가를 제한하는 동시에 젭춘담바에게도 조치를 취했다.

▶티베트인으로 轉生者 지목

[사진 = 복드칸 궁전]

우선 취한 조치가 젭춘담바와 비슷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 지도자를 내몽골에 세워 젭춘담바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했다. 그가 바로 장쟈 쿠툭투다. 티베트 불교의 제 1인자는 아는 대로 달라이 라마고 2인자는 판첸 라마다. 그 뒤를 이은 세 번째 지도자가 젭춘담바 쿠툭투이고 네 번째 인물이 장쟈 쿠툭투가 된 것이다.

그 다음 조치는 이후 젭춘담바의 전생자를 몽골인으로 정하지 않고 반드시 티베트인 가운데서 나오도록 하는 교칙을 세웠다. 그래서 1,758년 젭춘담바 2세가 34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을 때 전생자인 3세는 東티베트 리탄에서 찾아냈다. 이때부터 외몽골이 독립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젭춘담바 쿠툭투는 모두 티베트에서 환생했다.
 

[사진 = 복드칸 8세]

청나라는 이 같은 조치로 몽골의 힘이 결집될 가능성이 있는 구심점까지 흩트려 놓으려고 했다. 청나라 지배 말기에 외몽골의 독립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젭춘담바 8세였다. 그는 비록 티베트인기는 하지만 몽골의 독립을 주도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몽골인이 아닌 티베트인을 종교 지도자로 내세워 몽골인들이 뭉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청나라의 시도는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전생으로 이어진 젭춘담바는 육체가 변해도 인격은 항상 동일했게 여겨졌다는 점에서 어느 나라, 어느 종족 출신인가 하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티베트인인 젭춘담바 8세도 칭기스칸 가계 후손인 젭춘담바 1세, 자나바자르의 환생으로 여겨졌다.

▶가난의 늪 속으로 추락한 몽골인
아무튼 종교의 열풍이 일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 출산 감소와 노동력의 부족이었다. 청나라가 겨냥한 적정한 수준으로의 인구 감소는 저절로 이루어졌다. 생산력이 떨어지면서 몽골인들은 가난의 늪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는 조금이라도 잉여재산이 있을 경우 이를 티베트 불교에 시주하도록 유도했다.
 

[사진 = 간단사 예배 행사]

물론 수많은 사원을 짓는 데 드는 자금도 몽골의 몫으로 넘겼다.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몽골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다. 몽골 국립대 잉크체첵교수는 청나라 지배를 받은 2백년 이상의 세월은 몽골인에게 암흑의 시대였다고 지적했다. 군인이 줄면서 군사력이 극도로 약해진 대신 몽골인들은 가난에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는 청의 철저한 지배로 몽골인들은 재갈이 물려진 말처럼 순하게 길들여졌다. 가축을 제대로 갖지 못한 유목민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생활고에 찌든 빈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거나 들짐승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이어가기도 했다. 청의 몽골 지배 속에 그래도 상류층 인사들은 청에 협조하며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와는 반대로 하층 민중들은 생활자체가 무너지는 어려움 속에 허덕이며 인간 파괴의 아픔을 맞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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