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영화 자체보다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 공식 집계된 관객수는 고작 8만635명. 1000만 관객이 허다한 시대에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다. 반면 이 영화의 제목을 모르는 이는 드물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대화를 듣다 보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시제를 뒤집어 기억하는 것이다. 더러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고도 한다. 모두가 같은 말일 것이다. 세월에 따라 정의와 불의, 선과 악도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나.
공자(孔子)도 시대에 따라 대접이 달랐다. 정작 자신이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오히려 세월이 흘러 대성(大聖)의 반열에 올랐는데, 제자들을 잘 둔 덕일 것이다. 유명한 논어(論語)도 공자가 아니라 제자들이 엮었다. 그랬던 공자도 근대 중국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철저히 배격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복권되고 있지만.
사기(史記)의 작자 사마천(司馬遷)도 조금은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예컨대 성인(聖人)이라는 표현부터 그렇다.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노(魯)나라 대부의 말을 빌려 “공구는 성인의 후예다(孔丘聖人之後)”라고 했다. 유학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공자님이 성인(聖人)의 후예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에 다른 해석도 있다. 공자의 부친이 장군이고, 어머니가 무당 집안이라는 점에서 ‘성인’이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성인(聲人)’, 즉 무당으로 보는 것이다. 성인 성(聖)도 귀 이(耳)로 시작한다. 글자는 같으나 뜻이 다른 동자이의(同字異意),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이자동의(異字同意)의 경우란 것이다.
공자는 동시대부터 ‘성인’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자(老子)의 평을 보자. 공자가 예(禮)에 대해 묻자 “그대가 말하는 성현은 이미 뼈가 썩어 없어지고 오직 말만 남았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감춰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으나 모양새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한다. 이어 “그대는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려라”고 충고한다. 한마디로 공자는 교만하고 욕심이 많으며, 군자인 척하지만 야심이 크다는 것이다.
근대 중국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루쉰(魯迅)의 평도 묘하다. “공자의 위대함은 임기응변이 비결”이라고 했다.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는 조상이 계신 듯,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신이 계신 듯이 했다는 것이다. 그가 볼 때 공자는 신이나 조상의 혼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혼령이 있다고 믿었던 당시 사회분위기를 감안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런 ‘척’했다는 것이다. 공자가 비판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 공자 본인의 성공비결이라는 말일까.
야합(野合)도 그렇다. 공자세가는 공자의 출생에 대해 ‘흘여안씨녀야합이생공자(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라고 기록하고 있다. 70세인 숙량흘(叔梁紇)과 방년 16세인 안씨의 셋째 딸이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야합은 ‘들에서 합쳤다’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국어사전 설명처럼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통함’이거나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림’일까.
사기의 ‘백이열전’에서 공자의 수제자 안회를 ‘준마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는 파리’쯤으로 치부했던 사마천 아닌가. 공자를 ‘열전(列傳)’이 아닌 제후급의 ‘세가(世家)’에 넣었고, 열전도 공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공자의 ‘춘추필법’까지 흠모한 그가 어떤 의미로 이런 표현을 썼을까.
후대의 유학자들도 이 점이 불편했을 듯싶다. 그래서 ‘문질빈진(文質彬彬)’, 즉 군자는 꾸밈과 본바탕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을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본바탕이 꾸밈을 누르면 야(野)라 한다(質勝文則野)’는 해석을 붙인다. 안씨녀는 숙량흘의 세 번째 부인이다. 그래서 초례청을 차리는 등 ‘꾸밈’을 생략하고 초야의 ‘본바탕’으로 결합했다는 뜻으로 봤다. 정말 사마천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똑같은 사안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남산을 예로 들자. 서울 필동쯤에서 남산을 오르는 이는 북한산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꿈틀거리듯 그려내는 능선에 찬탄한다. 한남동에서 오르는 이는 한강의 넉넉함과 관악산의 날카로운 실루엣에 감탄한다. 그들이 만나 남산을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서로 다른 산이라 여길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랴.
'박종권 편집위원' 이처럼 글자는 그대로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른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