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서
“그랬군요. 저 이00은 그럼 그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불매서원에서 공부할 때도 함께 하였습니까?”
“호호. 좀 이상한 질문이군요. 그럼요. 항상 앞자리에 앉아계셨죠. 선생님의 호는 공서(空嶼, 빈섬)라 하였지요. 쇠잔한 국운을 슬퍼하며 이 땅을 다시 새롭게 갈아엎어 오래전 연암(燕巖)이 ‘허생전’에서 갈파했던 ‘무인공도(無人空島, 유토피아)’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하였습니다. 공서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는데, 수회스승이 분신처럼 아꼈던 제자였습니다. 공서는 어느날 학우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시를 읊었습니다. 매죽헌(梅竹軒, 성삼문)가 읊었다는 임사부(臨死賦(죽음에 부친 시))였습니다. 절명시(絶命詩)라고도 하더군요. 모두가 의병 참전을 놓고 논의가 분분할 때, 불매서원이 떠나가도록 목청을 돋워 그는 이 시를 읊었습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둥둥둥 북소리 사람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고개 돌리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가는 곳 주막 하나 없을텐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밤 누구 집에서 잠들리오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저항하다가 몸이 찢기며 숨을 거두기 전에 고개 들어 읊었다는 시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지켜야할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육신을 버려야할 때도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날 그 열변을 듣고 그만 그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모하게 되었다고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끙끙 앓던 나는 부친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수회스승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를 사모하는 뜻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한 것이리라. 오빠와 두 언니에 비해 유독 총명하여,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크게 뜻을 두었던 너였으니, 오죽하랴? 공서의 강지(剛志)와 혜안은 우리 서원의 자랑인 것을. 하지만 그가 기혼(旣婚)하여 솔가한 몸이니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옳겠구나.’”
“이미 결혼을 했었다고요?”
“예. 1889년 공서는 결혼을 했고 이미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 국오
“18살이 되던 해 내가 마음이 만든 병으로 시름시름 앓자, 아버지는 서둘러 혼처를 찾았습니다. 안동에서부터 집안끼리 잘 알았던 의성김씨 집안과 혼담이 오갔습니다. 내 나이 스물 한 살의 그 가을, 내 가마가 그 집에 당도했을 때 살짝 젖혀진 비단 가리개 틈 사이로 소담하게 피어오른 소국(素菊,흰 국화)을 보았습니다. 햇살이 담장에 쏟아져 내려 그 꽃이 어찌나 눈부시던지...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그것이 내가 국오를 만나게 되는 인연입니다.”
“부군인 김영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학문에서는 그대가 불매학원의 으뜸이었으나 스승의 가장 충직한 제자는 국오였습니다. 워낙 과묵하였으나 수회 선생의 창의(倡義)에는 언제나 그가 앞장 섰습니다. 안동 유림들은 영양의 거사(擧事)를 보잘 것 없다 하였으나 그것은 내막을 모르는 말들이었지요. 국오는 영양, 봉화 일대를 넘어 동해안의 삼척 일대까지 활동한 의병대의 중요 간부였습니다. 저 또한 남편의 뜻을 좇아, 의병들을 돕고 밀계(密計)를 전하는 일을 맡았었지요. 국오는 신혼 때에도 집에 머무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공부를 하러 불매서원에 가 있거나 병사들을 훈련하는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국오는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습니다. 전투에서 총알이 떨어졌을 때 곡괭이로, 무장한 왜경을 쓰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국오와 공서는 서로 친했습니까?”
“친하다 마다요. 서로 죽고 못사는 친구였습니다. 나이 차이는 제법 났으나, 연장자인 제 남편이 공서를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존경이기도 했고, 또 국오가 워낙 겸손한 사람이라...... 사랑에서 공서와 술잔을 기울이는 날에는, 늘 시를 읊으며 시국을 걱정하였습니다. 공서는 술이 약해서 몇 잔만 들이켜도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래서 두 분이 함께 마신 뒤에는 오직 공서만 취한 얼굴이 되어, 국오가 놀리기도 하였더이다."
"어느날 두 분의 대화를 기억합니다. 국오가 물었습니다. 양혜왕(梁惠王)이 맹자에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맹자는 ‘어찌 이로움’을 말하느냐고 꾸짖어 그 질문을 꺾어버렸소이다. 대학의 평천하(平天下) 장에 보면 이(利)로써 이(利)를 말하지 않고 의(義)로써 이(利)를 말해야 한다고 했으니, 양왕의 질문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利)가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의(義)가 아니었는지요? 그런데도 맹자는 어찌 그것을 이로움을 취한다고 반박하였을까요. 이렇게 묻자 공서가 술잔을 기울이고는 대답하더군요. 국오, 맹자는 이로움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양혜왕은 이오국(利吾國)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간에 들어있는 오(吾)자에 들어있는 이기심을 나무란 것입니다. 나라에는 왕 말고도 대부와 선비와 서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오로지 개인소유로 나라를 들먹이며 그것이 이롭게 되는 것을 물었으니 성인이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이로움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의로움이 되려면, 더욱 치열하게 무사(無私)와 공평(公平)의 대의를 지녀야할 것입니다. 나라가 침탈당한 데 대한 우리의 울분도 개인적인 원한이나 불편에 대한 분개나 외세에 대한 경멸 따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큰 명분을 지니고 하늘에 합당한 이치로 싸워야 맹자같은 성인도 박수를 칠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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