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이 홍성공업전수학교 학생시절 일본인 형사가 조선인 선생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일본 형사를 흠뻑 두들겨 패준 사건으로 부득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될 때, 차일혁을 독립군으로 이끌어줬던 사람인 바로 호(號)가 지강(芝江)인 김성수 선생이었다.
김지강도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주동자로 참가하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중국으로 건너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뜻이 맞았다. 중국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때부터 때로는 사제지간(師弟之間)처럼, 때로는 부자지간(父子之間)처럼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됐다. 차일혁과 김지강은 중국 상해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김지강은 중국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발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차일혁은 상해의 어느 팥죽집에서 김지강을 만났다.
그로부터 차일혁은 김지강을 사흘에 한번 꼴로 만났다. 만나는 장소는 상해의 저자거리에 있는 팥죽집 아니면 조선식 대폿집이었다. 당시 그 근처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한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김지강은 차일혁을 보고 “난 자네의 맑고 굳센 눈빛을 보는 순간 이봉창(李奉昌)의 눈빛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네.”라고 말했다. 김지강은 쏘아보는 듯한 차일혁의 강한 눈초리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차일혁도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도수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하게 됐다. 차일혁은 스승이나 다름없는 김지강 선생에게 자신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려줬다. 일본인 경찰을 때리고 도피한 일, 금강산에 피신했다가 곤경에 처한 귀부인을 구해준 일,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그 집 수양딸과 결혼한 일, 그런데 장인이 헌병 대좌를 지낸 중추원 참의였다는 사실, 그리고 장인의 힘을 빌려 중국에 오게 된 일들을 보따리를 풀어 제치듯 낱낱이 털어놨다.
이후 차일혁은 김지강이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김지강은 상해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 단체에 가입하여 김지강 선생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당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백정기(白貞基)와 이강훈 등이 주중일본공사를 처단하려다 사전 정보노출로 인해 실패한 육삼정(六三亭)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주축이었던 박기성(朴基成)마저 중국중앙군관학교 11기생으로 입교하는 바람에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그 무렵 차일혁은 김철(金喆)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들은 대부분 가명을 썼다. 국내에 있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自救) 수단이었다. 만에 하나 일본경찰에 잡혔을 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기 않기 위해서였다. 어려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으로 인한 가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한 배려였다. 차일혁은 어머니의 ‘김’씨 성에다가 어렸을 때 이름이었던 ‘차용철’에서 ‘철’자를 따왔다. 이름만 보면 전혀 알 수 없는 이름이 됐다. 김지강이나 박기성이 광복 이후 차일혁을 보고 ‘철 동지’ 또는 ‘김철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런데 김지강의 신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1937년 1월 17일 김지강이 상해의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때 차일혁은 김지강과 같이 있었는데, 다행히 몸이 빠른 차일혁은 그곳을 빠져 나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으나, 김지강은 그만 잡히고 말았다. 이를 두고 차일혁을 오해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차일혁이 김지강을 배신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바로 6·25전쟁 중 김지강을 만났던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가 그의 비망록에 이 부분을 기록해 뒀다.
김만석 기자는 당시 김지강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기록해 뒀다. 김만석의 비망록에 의하면 “철(喆, 차일혁의 가명) 동지는 내 아들도 되고 제자도 되지만,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잡힌 것이 차일혁 때문에 잡혔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에게 더 큰 임무를 주었다.” 이로써 차일혁에 씌어 진 혐의는 당사자인 김지강이 광복 후 밝힘으로써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벗겨졌다.
김지강은 황해도 해주감옥으로 이송되어 1938년에 징역 18년의 중형을 선고 받고, 9년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8·15광복이 되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게 됐다. 차일혁은 김지강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광복을 맞게 되자 귀국했다. 귀국한 차일혁은 김지강이 해주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주감옥으로 갔으나, 서대문형무소로 이감(移監)됐다는 말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차일혁이 서울에 왔을 때는 광복된 지 1개월이 지난 9월 중순이었다.
이때 차일혁은 제대로 먹지를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차일혁이 뒤늦게 서대문형무소로 갔으나 김지강은 이미 출옥한 뒤였다.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출옥동지회’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곳 사무실을 찾아갔다. 천만다행으로 그곳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녔던 김지강을 만날 수 있었다.
광복된 서울에서 차일혁은 김지강으로부터 많은 사람을 소개받았다. 대부분이 독립투사이자 애국자들이었다. 이때 차일혁은 “사회혁명에 도움을 주는 이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차리혁(車利革)’으로 지었다. 차리혁으로 개명한 차일혁은 전국의 독립투사(아나키스트) 67명이 모여 만든 ‘자유사회건설자연맹’에 가입했다. 그때가 1945년 9월 29일이었다. 여기에는 남화한인연맹 출신인 김지강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창, 노동자자치연맹 대표와 공주경찰서장을 역임한 조시원, 그리고 국내에 남아 있던 총독부 관리들을 처단하게 될 공형기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아나키스트(anarchist)는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로 알려졌으나,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 않았다. 차일혁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일혁은 1948년 정부수립 후 국방부 산하의 호국군과 청년방위대에서 간부로서 활동을 했고, 전쟁 때에는 경찰에 투신하여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운 것을 보면, 무정부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없지 않아 있었다.
광복된 조국에서 이들 아나키스트인 김지강, 이규창, 공형기, 차일혁 등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것을 다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조선총독부가 물러간 뒤의 행정상의 공백과 빠른 치안유지를 이유로 일본 총독부 관리들을 군정에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김지강과 차일혁 등은 이러한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를 탄압했던 일본 총독부 관리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물론 미군정하에서 이것은 법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을 차일혁 일행이 아니었다.
이후 차일혁은 그들을 처단할 권총을 3자루를 어렵게 구해 집에 숨겨두고 처단할 자를 물색했다. 드디어 처단할 자를 찾아냈다. 먼저 독립투사들을 괴롭혔던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미와(三輪) 경부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원산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다음으로 지목된 자가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던 사이가(齊賀)였다. 사이가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미와 경부에 필적하는 대표적인 악질 경찰이었다.
사이가는 차일혁·김지강·이규창·공형기 등 4명에 의해 서울 원남동에서 사살됐다. 그때가 1945년 11월 2일 저녁 무렵이었다. 차일혁 일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총독부 상해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무수히 잡아갔던 츠보이(坪井岩松)를 권총으로 처단했다. 일설에 의하면 상해에서 잡힌 독립투사 중 츠보이에게 조사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악명을 떨쳤던 악질 경찰이었다. 이로 인해 차일혁은 미군정의 수배를 받게 됐다.
이후 차일혁은 미군정의 눈을 피해 전북 전주로 내려와 공장을 다녔고, 이로부터 얼마 후 대동청년단, 호국군, 청년방위대에서 간부로 활동을 하게 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차일혁은 육군대위로 신태영 장군에 의해 특별 임관되어 유격대장으로 활동하다가 팔에 총상을 입고 전역을 하게 된다. 중공군 개입 이후 후방지역, 특히 지리산과 가까운 전북지역에서 빨치산들이 크게 준동을 하게 되자, 빨치산을 토벌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에 천거되어 임명된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 용맹을 떨치며 연대급 전투경찰부대인 철주부대장과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예하의 제2연대장으로 빨치산을 토벌하고 결국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을 사살함으로써 빨치산토벌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명예롭게 마치게 된다. 이후에는 충주경찰서장과 진해경찰서장 그리고 공주경찰서장으로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치안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과 김지강은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 기억날만한 일이 1954년 8월 21일경이다. 이때 차일혁은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예하의 제2연대장을 훌륭히 마치고 사령부의 수사사찰(搜査査察)과장으로 영전되어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김지강 선생을 비롯하여 광복 후 악질 일본 형사들을 처단했던 옛 동지들이 차일혁이 근무하고 있는 사령부로 찾아왔다. 반갑기 그지없는 얼굴들이었다. 꿈에도 잊지 못할 김지강과 이규창 등 옛 동지들이었다.
차일혁은 관사로 그들 일행을 모시고 가서 오랜만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차일혁이 김지강 선생의 근황을 물었다. 그는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밀양에서 입후보 했으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선거운동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낙선했다고 했다.
김지강은 당시 아나키즘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와 다름없이 취급받고 있었다. 김지강은 만주에서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 밑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희생되는 것을 본 강렬한 반공주의자임에도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공산주의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규창은 감사원의 전신인 감찰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방문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말은 안했지만 차일혁이 공산주의자와 어울리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살아생전에 김지강 선생도 “차일혁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이면서도 나라를 사랑했고, 인본주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국가보다도 더 부하를 사랑하고 주민을 사랑하고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김만석의 비망록에 있는 말이다.
차일혁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오히려 차일혁은 일행을 데리고 남원(南原)의 명소인 광한루(廣寒樓)를 구경하러갔다. 당시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는 전북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광한루와는 가까웠다. 이때 차일혁은 가족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차일혁은 이들과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때가 1954년 8월 22일경이다. 이로부터 몇 년 후 차일혁은 공주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순직했고, 김지강도 차일혁 순직 후 10년 후인 1969년 69세의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독립투사였던 김지강 선생에게 1977년 뒤늦게 독립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차일혁은 아직도 독립운동에 대해 정부로부터 서훈(敍勳)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국가를 위해 일한 공적만큼은 국가가 반드시 보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명화된 선진국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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