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아이아(Ushuaia).
‘땅끝마을’ 또는 ‘세상 끝’으로 불리는 아담하고 예쁜 바닷가에 왔다.
인구 5~ 6만 명.
땅끝이라곤 하지만 앞쪽이 탁 트인 망망대해는 아니다.
오히려 뾰족한 설산들에 둘러싸여 포근한 호수마을처럼 보인다.
한복판에 고풍의 큰 교회당이 묵직하게 자리해 도시 전체를 차분하게 눌러주는 듯하다.
도착하자마자 점심 식사를 하고 비글해협 투어를 다녀오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괜스레 와인이 당긴다.
카페든 레스토랑이든 바다를 바라보며 분위기를 잡고 싶건만 버스에 배에 오랜 시간 시달린 동행자 아내가 너무 피곤하단다.
할 수없이 해산물 스튜 등을 포장으로 사들고 마트에 들러 와인과 과일 치즈를 준비해 숙소에다 판을 벌였다.
조금은 쭈구렁스럽지만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니 그나마 다행이다.
유튜브로 촉촉한 노래를 골라 들으며 와인잔을 기울인다.
최희준부터 라라 파비안까지.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도 제격이다.
“~나는 지금 우수아이아~”
애조 섞인 노래가 땅끝마을의 밤을 애잔하게 적신다.
바다가 안 보이면 어떠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땅끝인데.
와인에 젖고 음악에 취하니 ‘땅끝’이 고즈넉하게 흔들린다.
파나마 운하가 열리기 전엔 비글해협을 통과하는 배들로 항구가 북적댔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서울과 모든 게 정반대.
12시간 시차로 서울이 낮이면 이곳은 밤이요, 서울이 여름이면 여긴 겨울.
인천공항을 떠난 지 보름 남짓. 안데스산맥을 넘나들다 1월 중순 이곳에 도착했다.
어느새 꽤나 멀리도 왔다.
서울은 이상 한파로 꽁꽁 얼어붙었다는 데 우수아이아는 한 여름.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남극과 가깝다 보니 기온은 섭씨 10도 안팎으로 서늘한 편이다.
밤엔 바람까지 가세해 으스스 춥다.
파타고니아 절경 지대를 거쳐서 온다.
그들의 호사스러워진 눈에 이곳의 풍경 자체는 그다지 감명을 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바닷가를 거닐며,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항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검고 뾰족한 석산과 석산에 드문드문 쌓여있는 흰 눈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특히 배를 타고 1시간쯤 달려
비글해협 대서양 쪽 초입에 외롭게 서있는
‘세상 끝 등대’와 마주할 때면 숙연해진다.
이곳은 풍광을 즐기러 오는 곳이 아니다.
‘끝’을 맛보러 오는 곳이다.
‘끝’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에 젖고자 찾는 곳이다.
그래서 와인과 애조의 음악이 당기는 곳이다.
실연 당한 사람들은 ‘세상 끝 붉은 등대’에 슬픔을 묻고 간단다.
여기서 남극까지는 1,000km.
쇄빙선도, 남극기지 관계자들도, 일반 관광객도 이곳에서 출발하여 남극으로 향한다.
우수아이아는 남극행 전초기지인 셈이다.
백발을 날리며 남극 쪽을 바라본다.
왔다 가는 인생 자체가 여행 아니던가.
칠순이 가까운 나이.
그 여행길 또한 꽤나 멀리 왔다.
나의 생극(生極)도 코앞이구나.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저 넘어 마을.
등대 앞에서 그곳을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게 된다.
‘세상 끝 등대’의 마력이다.
행복했던가?
즐거움은 아주 짤막한 순간들이었을 뿐,
오히려 놓쳐버린 안타까움과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하고픈 욕망들이 여전히 꿈틀대지만 등대가 말한다.
"열정과 격랑의 시대는 지나갔노라. 이곳은 욕심을 접고 하나 둘 내려놓기를 시작하는 구간이니라."
가마우지와 흰 바다제비 등이 새카맣게 모여 버글거린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찍어보지만 거리가 멀어 선명한 작품을 건지긴 쉽지 않다.
여행길 나서기 직전 핸드폰 망원렌즈가 있는 걸 알고 구입하려다
아내의 핀잔에 포기한 게 아쉽다.
요즘엔 핸드폰이 사진을 너무 예쁘게 찍어준다.
경관 좋은 곳에서 대충 눌러대도 항상 기대치를 앞선다.
전 세계 모든 관광지는 이미 폰카에 점령됐다.
셀카봉 막대기도 갈수록 늘어난다.
폰카가 망원렌즈까지 너끈히 소화해낸다면 앞으로 큰 카메라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외딴 섬에서 바다사자 무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꾸웩~ 꾸웩~” 시끄럽게 소리 지른다.
덩치 큰 수놈 한 녀석이 수십 마리의 암놈 사이를 거칠게 헤집고 다닌다.
아기 한 마리가 큰 덩치에 깔릴까 조마조마한 찰나
엄마인 듯 암놈 한 녀석이 나서 수놈에게 뽀뽀를 해준다.
절륜(절륜)의 정력을 상징하는 바다사자 수놈, 부럽다.
우수아이아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티에르 델 푸에고 국립공원엔
산길 바닷길 호수길 등 트레킹 코스가 수두룩하다.
시간과 체력에 맞춰 골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칠레 쪽 빙하에서부터 흘러내려온다는 호수엔
희귀조 검은 목 고니(black naked swan)가 여유롭게 떠다닌다.
이맘때쯤 팔당댐 일대를 장식하는 흰색 고니.
그리고 몇 년 전 뉴질랜드 북섬서 만났던 검은 고니.
그 둘을 섞어 만들었나.
몸통은 하얗고 긴 목만 까만 고니들이 둘씩 짝을 이뤄 두둥실 떠다닌다.
자태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친다.
함께 걷던 아내가 핸드폰을 꺼내 녀석들을 열심히 담는다.
오랜 여행길 다투며 토닥이며 늘 곁에 붙어 함께 걸어온 길벗.
새삼 따사로움을 느낀다.
고맙고 고맙고 고맙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니던가.
아픔 슬픔 상심을 내려놓고
새로운 바램과 희망을 엽서에 담아 우체통에 넣고 떠난다.
그들을 따라 하기가 쑥스러워 마음속으로만 엽서를 띄운다.
내가 나에게 하는 바람이자 다짐이다.
"아웅다웅하지 않기. 나서지 말기.
그러나 아주 뒷전은 아니게.
많이 비우고 조금 채우기. 훈수는 줄이고 박수를 늘리기.
분수에 맞게 행동하기.
많이 웃기.
그리고 무엇보다
추해지지 말자."
우수아이아 위치
서울에서 지구 중심부를 꿰뚫어 도달하는 정반대 지점(대척점. antipode)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계의 근해 대서양 상에 있다. 서울이 북위 37.5도 동경 127도. 대척점의 좌표는 남위 37.5도 서경 53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동쪽으로 가깝다.
지구 둘레가 약 4만 km인 만큼 서울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그 절반인 2만 km 남짓. 약간 짱구로 알려진 지구의 평균 지름을 대입하면 직선 12,742km 거리다. 참고로 백두산~한라산 거리는 1,000km가 채 안된다.
서울의 대척점에서 다시 3,000km쯤 남하하면 우수아이아에 닿는다.
인천공항서 직항 비행기는 없다. 태평양을 건너는 항로와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는 두 갈래의 하늘 길이 있는데 모두 최소 두 차례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비행시간만 태평양 쪽이 27~28시간으로 대서양 노선의 30~31시간보다 다소 짧지만 중간 대기시간을 합치면 양쪽 길 모두 35시간 안팎이 걸린다.
우수아이아는 대륙 최남단에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대륙의 끝은 아니다.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칠레령 혼곶(串. cape horn)이 남극에 가장 가까운 남미의 끝이다.
혼곶(남위 56도)은 아프리카 최남단(35도)은 물론 뉴질랜드 남쪽 끝(47도)보다도 더 아래쪽이다. 명실공히 땅끝이다.
1520년 10월 21일 포르투갈 출신 스페인 항해가 마젤란은 남미대륙을 돌아가겠다며 이곳을 지나가려 했으나 거센 파도를 마주하고 포기한다. 폭풍우를 피해 강인줄 알고 잔잔하고 폭이 좁은 수로로 접어들었는데 36일 만인 그해 11월 28일 평온한 망망대해를 만난다. 자신들도 모르게 태평양으로 통하는 항로를 발견한 것이다. 마젤란 해협이다.
그 후 58년 후인 1578년 영국 군인 드레이크가 남극과 남미 대륙 사이의 수로를 지나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드레이크 해협이라고 명명했다. 드레이크 해협은 평균 파고가 10미터, 폭풍우 때 30미터에 이르는 지구상 가장 거친 바다다.
남위 60도 선이 해협의 가운데를 지나는데 해협의 파도가 매우 험난해 ‘절규하는 60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해협을 처음 통과하기는 161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럼 스하우턴이 이끈 탐험대다.
1830년엔 찰스 다윈의 탐사선 비글호가 탐사활동을 하다 잔잔한 새 항로를 발견하고 배의 이름을 따 비글해협이라고 명명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공동 관리하고 있는 이 해협의 아르헨티나 쪽에 우수아이아가 자리하고 있다.
이 3개의 해협이 1914년 파나마운하가 열리기 전까지 태평양~대서양을 오가는 수로였다. 선박 기술이 발전하면서 최근엔 악명 높지만 널찍한 드레이크 해협을 선호하는 선박이 늘고 있다. 이 해협과 접한 킹조지섬에 한국의 남극 탐험 세종 기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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