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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당시 몽골 내부에서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군벌에 의해 몽골의 자치가 취소된 1,919년을 전후해 몽골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몇 개의 소그룹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서로 연대 활동을 통해 1,920년 6월 몽골인민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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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수흐바타르(몽골국립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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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 이르쿠츠크]
러시아 공산당이 몽골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스테른베르그의 외몽골 침입때문이었다. 그래서 1921년 1월 이르쿠츠에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이 설립되자 그 산하에 티베트 몽골부를 설치하고 몽골 문제를 담당하도록 했다.
▶白軍의 외몽골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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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복드칸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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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태준]
▶수흐바타르軍의 백군 격파
러시아측은 스테른베르그의 백군이 몽골로 밀고 들어갈 때부터 일본과 중국의 반응을 살피면서 몽골에 군사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1년 3월, 몽골인민당은 제 1차 당 대회를 러시아의 국경도시 데드시베에서 열고 임시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 강령을 보면 이들은 장기적으로 전체 몽골족의 통합과 독립을 지향하면서 당면과제로서는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임시 인민정부는 군대를 모집해 후레를 점령하고 있는 백군을 몰아내기 위한 행동에 곧바로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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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수흐바타르]
이어 소비에트군의 지원 아래 외몽골을 공략해 들어갔다. 후레까지 밀고 들어간 인민군은 스테른베르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잠시 백군의 수중에 있었던 외몽골은 다시 몽골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스테른베르그는 그해 9월 처형됐다.
▶몽골인민혁명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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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몽골전통무용 ‘참’ 공연(칭기스칸 광장)]
1,921년 11월 몽골 인민정부와 러시아 사이에는 우호조약이 체결되고 두 나라는 서로를 독립국가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國父 수흐바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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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광장 (舊 수흐바타르 광장)]
광장의 이름도 수흐바타르였다. 그러나 2,013년 몽골정부는 이 광장의 이름을 칭기스칸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칭기스칸의 동상도 정부청사 앞에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 광장을 수흐바타르 광장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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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수흐바타르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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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동상에 새긴 어록]
"전 인민이 같은 방향으로, 같은 의지로 뭉친다면 얻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시민의 휴식처 수흐바타르광장
아마 울란바토르를 방문했던 사람 가운데 이 광장에 가보지 않았거나 동상을 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도 여러 차례 이 광장을 지나쳤고 당시 바가반디 몽골대통령을 만나러가면서도 이 광장을 거쳐 정부청사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 광장은 울란바토르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장소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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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칭기스칸 좌상(몽골 정부종합청사)]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한 영웅
몽골혁명 당시 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수흐바타르는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 몽골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면서 몽골과 소련간의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처음으로 맺은 인물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그는 인민정부가 출범한 지 2년만인 1,923년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너무 일찍 죽어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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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광장의 사자상]
수흐바타르의 그러한 성향은 앞서 언급한 그의 동상에도 형상화 돼 있다.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시장 경제체제에서 2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몽골인들이 수흐바타르에게 내리는 평가는 과거처럼 한결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장의 이름이 칭기스칸광장으로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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