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일신(一身)이 모두 담(膽)”
상해 출발에서부터 국내 잠입, 상해 귀환의 모든 경로 및 절차는 임정의 지시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김가진은 편지를 몇 통 써서 며느리 정정화에게 맡겼다. 독립자금을 부탁할 인사들에게 전달될 것이었다. 백반을 풀은 물을 붓에 묻혀 한지에 적은 편지.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같지만, 불에 쪼이면 글씨가 드러나는 암호편지였다.
독립을 갈구하는 세력과 압제의 무리들 사이에, 필사적인 추격전이 벌어졌다. 백반을 이용한 암호편지의 비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왜경에게 포착되었다. 임시정부는 곧바로 새로운 통신수단을 고안해냈다. 이른바 노끈편지였다. 은밀하게 연락할 사연이 적힌 편지를 꼬아서 짐을 묶어 놓으니, 영락없는 노끈으로 보였다.
3월 초순, 수당은 상해를 출발했다. 상해에서 압록강 북쪽 국경 안동까지는 이륭양행의 배를 탔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망명할 때 올랐던 바로 그 배였다. 이륭양행은 아일랜드인 조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해운회사로, 이 회사 2층에 임시정부 교통국 안동지부 아지트가 있었다. 독립운동은 출발부터 국제적인 운동이었다.
# 잠입
국내 잠입경로는 연통제(聯通制)를 따랐다. 연통제는 임정 초기에 국무원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교통국이 말 그대로 임정과 조국을 이어주는 교통편이라면, 연통제는 국내에 구축된 비밀통신 연락망이었다. 이 두 체계는 임시정부의 명줄이 달린 보급선이자 신경조직으로서, 내무총장 안창호의 지휘 감독 아래 이원화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안동에 닿자마자, 수당은 임정의 지시대로 우강(友江) 최석순(崔錫淳)을 찾았다. 우강은 왜경 형사로 신분을 위장한, 임시정부의 연락책임자였다.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국내로 들여보내야 할 밀사가 어린 새댁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대면이었고, 사선을 함께 넘으면서 수당은 우강을 오라버니로 섬기게 된다.
왜경 형사의 누이동생으로 꾸며, 압록강철교를 건넜다. 신의주에는 또 한 명의 비밀조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창양복점 주인, 재단사 이세창 씨. 수당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천연덕스런 평안도 사투리로 말을 건넸다.
“몸조심하라요. 자기만 생각할 거이 아니라 남도 생각을 해야 하는 일이야요. 기래야 또 들어올 수 있으니까니. 명심하라요. 내레 솔직하게 한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시다. 독립운동 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래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장강일기> p60)
# 등 돌린 옛 고관들
이세창 씨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무사히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국내에 있는 동안, 임시정부가 마련한 수당의 은신처는 예관의 조카인 산부인과 의사 신필호의 집이었다. 그는 세브란스(현 연세의료원)에 근무했다. 세브란스는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이라서, 왜경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안성맞춤의 연락거점이었다.
수당은 이곳에 숨어, 시아버지가 지목한 인사들과 연락을 취했다. 물론, 직접 찾아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했다. 중간에 심부름을 맡은 이들이 있었고, 안전하다는 판단이 선 뒤에야 편지를 전하고 자금조달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돈이 걷히지는 않았다. 시아버지의 동지였던 옛 고관들은 이미 독립운동에 등 돌린 지 오래였다.
민영달. 민영휘, 민영기, 민영소처럼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나라를 말아먹은 같은 항렬의 민씨 척족과는 달리, 일제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나름 지조를 보전하려 했던 사람. 김가진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동아일보 창간에 5천원을 출자한 그는, 임시정부에 돈 내놓기는 거부했다. <독립신문> 주필 이광수가 일제에 투항해 ‘민족개조론’을 쓰던 시절이었다.
임정 지시대로 친정은 찾지 않았다. 시댁에는 잠깐 들렀다. 할머니와 아이들 밖에 없는, 쇠락한 집안. 왜경도 건드리지 않았다. 노여워하실 줄 알았던 시어머니는 반가워하시며, 부군과 장남의 소식을 물었다.
친척들이 보태주는 양식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는 듯했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압록강
상해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주권을 빼앗긴 조국. 등 돌린 어른들. 마치 적지에 들어왔다 탈출하는 것만 같은 야속한 기분에, 수당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다 제 뜻대로만 되믄 당초에 나라 망가뜨렸갔어? 그만 모은 것도 대단한 거야요.” 이세창 씨의 위로를 받으며, 수당은 발길을 재촉했다.
탈출은 잠입보다 더 어려웠다. 거룻배가 준비된 강기슭, 한밤중에 맨발로 삼십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세창 씨는 건너편까지 데려주겠다고 한사코 우겼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압록강은 울고 있었다. 밤배는 무섭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에 떠 있는 느낌. 순식간에 자신을 빨아 당길 듯이, 시시각각 폐부를 파고드는 깊은 울림.
강 건너편에서, 우강 내외가 죽은 사람 돌아온 마냥 반겼다. 상해에 도착하자, 모두들 추켜세웠다. 역시 동농의 자부다! 떠날 때는 극비리였지만, 나중에는 상해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당시 임정에서 가장 곧고 용기 있는 이로 꼽히던, 우천(耦泉) 조완구(趙琓九). 그는 수당의 임무 완수를 전해 듣고는, 이렇게 찬탄했다. “조자룡의 일신(一身)이 도시(都是, 모두) 담(膽), 정정화의 일신이 도시 담.”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