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④] 세계에 외친 독립청원, 승전국 논리에 좌절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남보라 기자
입력 2018-03-28 18:5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파리강화회의와 신한청년단

<파리강화회의와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
 

신한청년단이 파견한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앞줄 오른쪽 끝 앉은이가 김규식이다.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처리를 목적으로 1919년 1월 18일 열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27개 전승국 대표들은 2차 총회(1월 25일)에서, 윌슨이 제안한 국제연맹 창설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세계평화와 식민지해방의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기 직전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윌슨의 특사로 상해에 온 클레인의 ‘파리강화회의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연설에 고무되어, 국제정세 변화를 독립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우혁(鮮于赫) 등을 각각 러시아, 일본, 국내로 보냈다. 장덕수는 동경유학생들이 주축이 된 <2․8독립선언>을 이끌어내었으며, 선우혁은 평안도의 기독교 세력을 만세운동과 연결시켰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철두철미 이긴 자들의 잔치였다. 영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인도를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프랑스는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정세에서 전승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에게 조선을 독립시키라는 청원이 성사될 리 만무했다. 파리강화회의는 베르사유조약(6월 28일)으로 끝을 맺었고, 독일에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부르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