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봄이 지날 무렵, 임시정부는 사방이 꽉 막힌 형국에 빠져 있었다. 임정 설립을 주도한 세력의 노선은 어디까지나 ‘외교론’이었다. 이는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이 실은 독립청원서였고, 그래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독립선언으로 고쳐 썼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서대숙, <동아일보>, 1989.2.23.).
독립군의 거점이었던 만주와 아무런 연계가 없던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된 배경 또한 그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은 냉담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정 내부에서도 ‘외교론’은 파산에 이르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한 게 이때였다.
상해로 온 지 만 이태. 스물셋의 수당에게 국제정치의 흑막이나 파벌싸움은 먼 세계였다. 그는 오로지 시아버지가 더 위중해지기 전에 만주로 모셔가고 싶었다. 눈을 감으시더라도 독립군과 함께라면 얼마나 홀가분해하실까! 그것은 남편 성엄의 뜻이기도 했다. 연통제는 이미 붕괴되었고, 수당은 혼자서 험로를 뚫어야 했다. 여비도 없었다.
# 서울로 압송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철교를 건너면 무사할 거라고 설쳐대는 품이 미심쩍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수당의 심정은 절박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철교를 다 건널 쯤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검문에 걸려 허둥대는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왜경은 불문곡직, 두 사람을 체포해 주재소로 끌고 갔다.
왜경은 심부름꾼과 수당을 분리해 심문했다. 수당이 누군지 곧 탄로 났다. 헌데, 왜경은 그가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밀사로 두 번이나 드나들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심부름꾼도 그 사실은 몰랐다. 고문 위협에도, 상해에서 살기가 힘들어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만 둘러댔다. 어쩌면 어설프게 국내로 들어오다 잡힌 게 외려 다행인지도 몰랐다.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역에는, 악명 높던 종로서 형사부장 김태식이 나와 있었다. 종로서로 끌려갔는데, 웬일인지 형식적인 조사만 하고 풀어주었다. 이세창 씨도, 연통제 소속 다른 비밀조직원들도 끝까지 밀사의 정체를 숨겼던 것이다. 시댁에는 상해에서 온 전보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동농 위독.”
# 셋방을 빌려 차린 상청(喪廳)
수당의 마음은 급했다. 빨리 돈을 구해 상해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아뿔싸. 부리나케 시댁으로 돌아온 그를 맞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수당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에게 동농 김가진은 단지 인자하고 자상한 시아버지만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선배이자, 인간의 가치를 되새기게 해준 스승.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시어머니는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데리고 남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일가친척들의 지원도 완전히 끊겼다. 수당은 친정에서 얻어온 돈으로 셋집을 빌려, 상청(喪廳)부터 차리고, 문상객을 맞을 준비를 했다. 남편이 없는 시댁, 맏며느리인 그가 가장이었다.
상해에 있던 “나절로” 우승규가 동농의 임종을 지키고, <동아일보>에 부음 기사를 타전했다. 일흔넷의 고령으로 망명길에 올라, 불과 3년만인 1922년 7월 4일, 객지에서 불귀의 몸이 된 동농. 많은 이들이 문상을 왔다. 그 중에는, 어이없게도, 종로서장이 보낸 김태식도 끼어 있었다. 조의금이 꽤 많이 들어왔다. 수당에게는 그 돈이 모두 독립자금으로 여겨졌다.
시아버지 호상을 마치고, 작은 집을 얻어 시댁 식구들을 안돈시킨 뒤, 수당은 상해로 출발했다. 종로서장이 직접 여권까지 만들어주면서, 어울리지 않는 호의를 보였다. 기차로 부산에 가서, 연락선을 타고 나가사키로, 그곳에서 상해로 가는 여객선을 탔다. 시동생 용한이 따라나섰다.
# 친정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상해에서는, 임정 요인들이 시아버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동농의 유해는 쉬자후이 만국공묘에 묻혔다. 수당이 도착해 보니, 하다못해 수의까지 장례비용이 전부 외상이었다. 그 외상값을 갚으며, 수당은 또 한 번 느껴 울었다. 시아버지를 만주로 모실 여비가 장례식에 쓰일 줄 꿈엔들 상상했으랴.
지난 3년, 수당의 일상에서 시아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남편도 그러했기에, 부부는 자신의 앞날을 따로 설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수당은 성엄에게 유학을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선뜻 결심이 서지 않는 표정이었다. 수당은 그해 가을 다시 귀국해, 친정아버지를 찾아갔다. 당신께서는 흔쾌히 승낙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석 달 뒤, 그마저 세상을 떴다. 딸을 “예쁘고 영리한 것”이라 부르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항상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던 친정아버지. 그 그늘이 없었다면, 수당은 밀사 임무는 물론 며느리 역할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1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인생의 지주 두 분을 차례로 빼앗긴 수당은 가슴을 쳤다. 유학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수당은 남편과 백지 상태에서 진로를 새롭게 궁리해야 했다. 임시정부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 그보다, 생활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1923년 봄. 수당 정정화, 성엄 김의한, 스물 넷. 이 젊은 부부의 앞길에는 과연 어떤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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