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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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4-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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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전북일보 김만석 기자와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과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끔찍한 사이였다. 김만석 만큼 차일혁을 잘 이해하고, 차일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차일혁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김만석은 “차일혁이 없는 세상은 살아 갈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면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만석이 차일혁에게 보다 더 집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김만석은 차일혁의 독특한 성격과 보기 드문 인간적 매력에 이끌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의 종군기자로 자처해서 들어갔던 것 같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전쟁터에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 나누며 아름다운 우정을 꽃피울 수 있었다. 김만석은 차일혁과 함께 빨치산들이 득실거리는 전북지역의 험준한 산악지형과 지리산 등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지역을 누비면서 밀착취재를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김만석은 차일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시피하면서 ‘다양한 차일혁’을 발견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김만석은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과 ‘인간 차일혁’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픔과 비참함을 수 없이 반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차일혁이 보여준 다양한 형태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차일혁은 전투를 하거나 전투를 끝내고나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차일혁에 대해 김만석 기자는 때로는 그를 전쟁영웅으로, 때로는 토벌대상인 빨치산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관대한 적장(敵將)으로, 때로는 부하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따스한 마음씨를 지닌 전투지휘관으로, 때로는 스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찰(寺刹)과 부처를 사랑하는 불심(佛心) 가득한 불제자(佛弟子)의 모습으로, 때로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의인(義人)으로, 때로는 회식장소에서 일본노래를 부르는 상사(上司)의 술상을 걷어 차버리는 의협(義俠)의 사나이로, 때로는 매몰차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는 한 인간에 대해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김만석이 그런 차일혁을 알게 된 것은 1947년이었다. 그때는 차일혁이 전주에 있는 삼성제사공장에서 경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그 공장에는 김만석의 고창고보(高普) 선배가 총무과장으로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차일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이 처음 공장에 입사할 때의 이름은 차갑수(車甲洙)였다가 얼마 안 있어 차리혁(車利革)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차일혁(車一赫)으로 바꾸었다. 1년 사이에 이름을 세 번이나 바꾸는 신비한 사람이 바로 차일혁이라는 것이었다. 삼성제사공장은 전라도에서 제일 큰 공장으로 노동자가 600명이나 됐다. 그런데 그곳의 공장 노동자들은 좌와 우로 극심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차일혁은 “우인지 좌인지? 그리고 공장에 왜 입사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김만석 기자의 비망록에 의하면, 당시 차일혁이 다닌 공장에는 조(曺) 계장이라는 남로당연락책이 있었는데, 그는 전라북도 씨름장사로 황소를 여러 번 탄 적이 있었다. 그가 파업을 일으키자 노무과장이 된 차일혁이 그와 싸워 기절시킬 정도로 완력(腕力)이 센 사람이 바로 차일혁이었다.

차일혁은 전라북도 공안협회이사로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공장 대표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차일혁은 공장일도 하면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감찰위원장과 호국군(護國軍) 대대장으로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호국군이 해체되자 방위소령(防衛少領) 계급장을 달고 청년방위대(靑年防衛隊) 총무처장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유격대장으로 활약했다.

김만석은 “차일혁은 글씨를 잘 쓰고, 문학적 소양도 많은 사람이지만, 아버지가 누군지 잘 모르는 출신이 불투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해방 후에는 이름이 차철(車喆), 김혁(金赫)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남모르는 일들을 엄청나게 겪은 것 같았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이던 김지강 선생은 차일혁을 친자식처럼 대했다. 김만석이 보기에 김지강 선생은 차일혁을 항상 ‘철(喆) 동지’라고 부르면서, “철 동지는 내 아들도 되고, 제자도 되지만 한 번도 내 뜻을 거스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을 다양하게 평가했다. 때로는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로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때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가까운 사람으로, 때로는 국가보다도 더 부하를 사랑하고, 주민을 사랑하고, 벼슬에 대해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차일혁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치 오디세이 작품의 전쟁에서 돌아온 한 영웅처럼 불가사의한 사람이라고 했다.

차일혁이 언젠가 김만석 기자에게 “계백 장군처럼 나라에 전쟁이 나면 나도 내손으로 가족을 다 죽이고, 산에 들어가 일을 해야 된다. 그 이유는 가족이 인질이 되면 안 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김만석 기자는 섬뜩했다고 했다. 그리고 차일혁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고 했다.

차일혁에 대한 김만석 기자의 의문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차일혁은 왜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있는 북한을 택하지 않고, 남한을 택했을까?”였다. 또 하나 “차일혁이 왜 대한민국이 아무리 자유주의민주주의를 택했다고 해도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대한민국으로 왔을까?”였다. 김만석 기자는 그 해답을 차일혁이 민족정신을 지닌 것에서 찾았다. 김만석 기자는 민족정신을 강조한 차일혁이 쓴 다음의 글을 그의 비망록에서 애써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이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 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잔이었다고.”

차일혁이 죽은 다음, 김만석 기자는 누구보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전북일보에 차일혁에 대한 조사(弔詞)를 썼다. 조사에서 김만석은 “차일혁은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이었고, 항상 정의의 사도였고, 적의 앞에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치안의 최고 금자탑을 세운 그가 나중에 왕생극락하기 바란다.”라고 간단명료하게 썼지만, 진짜 심중에 있는 말은 하나도 쓰지 못했다.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의 죽음에 대해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샛별처럼 갔다. 그가 살다간 인생은 절대 고독이었다.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는 고독하고 신비스런 사람으로 깊은 속마음을 남에게 털어 놓지 않았고, 누가 욕을 하더라도 응석을 다 받아주었던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비망록에 깊이 새겨뒀다.

김만석 기자의 비망록에는 차일혁이 생전에 했던 말들이 어록(語錄)으로 남아 잠언(箴言)처럼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또 살고 죽는 것은 필연이고,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 자신이 굴복할까 봐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인생을 달관하지 않고는 도저히 뱉어낼 수 없는 철학적인 말들이 들어있다.

김만석의 차일혁에 대한 일화(逸話)는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종군기자로서 차일혁을 만난 김만석이 “만석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차일혁은 “만석은 너무 과하니 천석만 하시죠.”하며 웃었다고 한다. 물론 김만석의 ‘석(錫)’자는 주석 석이지만, 차일혁은 벼의 단위를 세는 ‘석(石)’으로 받으며 농담을 했다. 그런 차일혁을 김만석은 “천진스러웠다.”고 했다. 유머감각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재치(才致)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차일혁에게 김만석이 “승리를 축하한다.”고 하자 차일혁은 “국가의 위기에 대해 국민의 일원으로서 아직도 마음껏 일하지 못한 것이 미안스럽고, 부하를 희생시킨 책임자로서 유가족에게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만석이 보기에 차일혁은 “승리에 우쭐하기 보다는 희생당한 부하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그런 지휘관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김만석은 “차일혁은 한낮 강한 의지만을 가진 무장(武將)이 아니라, 의리와 인정과 사랑과 눈물을 아울러 가진 ‘정(情)의 인(人)’이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차일혁은 “적과 싸울 때에는 무자비했으나, 사살당한 적의 시신은 대원들을 시켜 일일이 매장해 주도록 했다.”고 했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왜 적의 시체를 묻어 주냐?”고 물었더니, “살아 있을 때는 적이지만, 죽은 후에는 시체까지 적은 아니다. 그러니 묻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김만석 기자는 “차(車) 대장, 아니 대한민국 경찰의 아량이 무척 빛나 보였다.”고 했다. 차일혁 때문에 경찰이 유난히 크게 빛나보였다는 뜻일 것이다.

오랫동안 차일혁 부대를 종군하며 취재했던 김만석 기자는 차일혁에 대해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때는 1951년 3월 초였다. 제18전투경찰대대가 있는 전주공업학교 오(吳) 교장이라는 사람이 김만석을 찾아왔다. 오(吳) 교장은 중학생 하나가 학교교실을 나누어 쓰고 있는 제18전투경찰대대 내무반에 탄창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그만 실탄까지 훔치려다 잡혔다며 선처를 부탁했다.

붙잡힌 학생의 아버지는 전주농림학교 교사인데 아들의 호기심이 벌인 일이라며, 오(吳) 교장에게 “자신의 아들이 풀려 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계엄하에서 실탄을 훔치는 일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차일혁 부대에서는 그 학생을 학교내 임시유치장에 가두고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오(吳) 교장은 차(車) 대장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차 대장과 가까운 김만석에게 선처를 해 달라며 부탁했다.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김만석은 차일혁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그러자 차일혁은 부하를 불러 “학생이 호기심에서 벌인 일이니 따끔하게 훈계하고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경무계(警務係) 부하는 실탄을 훔치려한 이유를 조사하고 있다며 사무적으로 말하자, 차일혁은 “이유를 조사할 것 없이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냥 방면하라.”고 단호히 지시했다.

전투경찰부대 대대장이지만 책임감이 있고 성격이 시원스런 차일혁을 사람들은 상당히 어려워들 했다. 그런 일 처리는 차일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일혁의 강력한 지휘조치에 김만석 기자는 또 한 번 차일혁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사나이다움에 흠뻑 빠진 격이었다.

김만석이 털어놓은 차일혁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때는 1951년 고창작전이 있기 전인 3월 초였다. 김만석 기자가 저녁 무렵에 태평동의 삼성제사공장 바로 옆에 있는 차일혁 집을 방문하게 됐다. 차일혁의 태평동 집은 6·25전쟁 전 목재상을 하던 그의 절친한 친구로 전주부자인 이양호와 삼남여객 사주(社主)인 이응우(李應雨) 등 몇몇 유지들이 돈을 거둬 사준 집이었다. 그들은 모두 김만석과도 친구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김만석은 몹시 놀랐다. 집 안에는 부안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인공시절(人共時節)에 잠시 부역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물러간 다음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자 안전하다고 여긴 빨치산 토벌대장인 차일혁의 집으로 피신해 와 있었다. 그 사람의 모습은 초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방에서 자술서를 쓰고 있었는데, 차일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분은 박용상 선생의 지인이기에 잠시 피신시키고 있다.”며 자술서에 도움이 되는 말이 없는지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김만석을 향해 물었다. 차일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도와줬다.

차일혁 집에는 그 사람 말고도 키가 조그맣고 18세 쯤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이 또 있었다. 그는 흥덕중학교 3학년 학생인데, 아버지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유명한 학자였다고 한다. 학생 아버지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고 처가인 흥덕으로 내려 왔으나, 전쟁 중에 미처 피난가지 못하고 있다가 부역을 하게 됐다.

그래서 학생 아버지는 산으로 들어갔고, 아들은 차일혁 집으로 피신해 와 있었다. 김만석은 아무리 사람이 좋기로서니 인공시절 부역했던 사람들까지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여 피신시켜 준 차일혁을 보고 또 한 번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차일혁이 죽자, 김만석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래서 “차일혁 없는 김만석은 존재가치가 없다.”며 허공을 향해 절규했다. 차일혁이 없는 세상에서 김만석에게 남은 유일한 벗은 이제 술뿐이었다. 하지만 술은 그의 내면속의 마음까지 치유해주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김만석은 차일혁이 없는 세상이 귀찮고 싫어졌다.

차일혁은 좀처럼 자기 속마음을 내 보이지 않았지만, 김만석과는 비교적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몇 안 되는 친우였다. 그러기에 의지가 강하고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며 자존심이 셌던 김만석도 유일하게 차일혁에게 매달렸다. 김만석은 차일혁을 향해 때로는 투정도 부리고, 때로는 욕도 하고, 때로는 부탁을 했다. 그런 차일혁이 어느 순간 사라지자 김만석은 허탈했다. 비록 나이는 차일혁이 김만석보다 세 살 어렸지만, 정신연령은 오히려 더 높았다. 김만석은 동생 같은 차일혁을 형처럼 대하며 의지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만석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차일혁이 남긴 전투기록과 자신이 쓴 비망록을 모두 자신의 아들이 아닌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車吉辰)에게 남길 수 있었다. 차길진은 그런 선친의 유고(遺稿)와 자료를 가지고 수십년을 선친이 싸웠던 전북지역의 산악지형과 지리산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며 전투지역을 답사하며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빨치산토발대장 차일혁의 전투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차일혁의 육신과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육필(肉筆)’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김만석이 보탠 또 하나의 기록과 차길진이 십수년을 발로 뛰어다니며 확인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보태지면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거듭나게 됐다. 이로 인해 차일혁은 이들 차길진에 의해 역사의 인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됐다. 그 결과 차길진이 쓴 책은 ‘차일혁의 6·25전쟁 난중일기’이자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의 전투기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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