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⑦] 등장인물:민족의 영원한 스승,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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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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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실역행 부르짖으며 평생을 조국독립에 헌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 1878~1938)
 

[도산 안창호 .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신으로, 만 스물도 안 된 나이에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평양 쾌재정(快哉亭) 앞에서 열고 감동적인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향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으며,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고 동포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1906년 귀국, 신채호,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1907년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민족계몽운동의 적통을 이어받은 최대의 항일비밀결사였으며, 독립군과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다.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해 민족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한편, 평생의 신념이었던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구현하기 위해,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했다.
만세운동을 이끈 뒤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한성(漢城), 노령(蘆嶺), 상해로 나뉘어져 있던 세 갈래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임정 수립 후, 내무총장, 국무총리대리, 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발행했고, 임정 분열 사태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26년 상해로 다시 돌아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왜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연달아 옥고를 치른 끝에, 꿈에 그리던 해방을 7년 앞두고 눈을 감았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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