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⑨] 윤봉길 의거, 임시정부의 존재감 만방에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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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0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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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만대군도 못한일" 중국을 감격시킨 수통 폭탄

아!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일제는 만주를 강점한 지 넉 달 만에, 상해를 침략했다. 장제스는 이번에도 저항하지 말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상대해야 할 그의 군대가 일본군에게 상처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상해 주둔 중국군은 이 명령을 어기고 일본군을 막았다. 상해시민들은 모금을 하며 도왔고, 중국군은 선전했지만, 결국 3월 초 휴전을 맺고 물러났다.
백범은 일본군에 대적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다. 김홍일의 조력으로, 중국인 잠수부를 고용해 일본해군의 기함 이즈모(出雲)을 수중에서 폭파하고, 일본군 무기창고도 날려버리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인애국단은 청년의용군을 모집해 전투에 나서려 했으나, 불과 수십명 인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4월 29일 천황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대대적인 전승축하행사와 열병식을 갖기로 했다. 상해주재 열강 영사들은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지만, 오만방자한 일본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군대가 철수한 마당에 발만 동동 구르는 형편이었다.
 

[윤봉길 의사 거사 직후 상해 훙커우 공원.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술렁이는 거리
그날 오전, 수당의 집에 백범이 찾아왔다. 몇 분의 점심상을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식사시간 맞추는 법이 없는 백범이다. 수당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시장으로 나갔다.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수당은 바지런하고 깔끔하다는 정평이 났기에, 중요한 회합 자리가 있으면 그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분주히 상을 차리자, 이동녕과 조완구가 들어섰고, 곧 백범이 왔다. 세 분은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이 또한 처음 보는 정경이었는데, 식사가 끝나자 백범은 난데없이 술 한 병과 신문을 사오라고 일렀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어른이 술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집 밖으로 나왔더니, 거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길가에 호외가 뿌려져 있었다. 중국 청년이 폭탄을 던져 일본 침략군 대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었다! 수당은 호외를 주워들고,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호외를 받아든 백범은 회심의, 그러나 침중한 안색으로, 일이 제대로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석오와 우천에게 술을 치고, 건배를 했다.
어른들이 자리를 물리고 나서, 수당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술렁이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호외가 다시 나왔다. 폭탄을 던진 이는 한국청년 윤봉길이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마주치는 중국인들마다 치사를 건네기 바빴다. 백범이 기다리던 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백범 김구와 윤봉길.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왜경에 체포된 도산 안창호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일본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와 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육군중장 우에다, 해군중장 노무라, 주중공사 시게미쓰가 중상을 입었다. 이때 다리 한쪽을 잃은 시게미쓰는, 13년 뒤 미주리 함상에서 맥아더가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대표로 항복문서에 조인하게 된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반한감정을 누그러뜨린 중국인들이었지만, 냉랭하기는 여전했다. 그런 그들이 한국인만 보면 반가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치 한국인 모두가 그 일을 해냈다는 듯이. 중국인들은 “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장제스는 “중국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왜경들은 임정 요인들을 체포하러 혈안이 됐다. 그때까지 프랑스조계 당국은 임시정부 식구들을 정치적 난민으로 취급해, 보호해주었다.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상해는 사실상 일본 점령지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들 또한 일본군의 압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상해를 떠나라고 경고했고, 백범은 모든 이들에게 피신할 것을 지시했다.
내무부와 한인애국단의 노력으로 왜경에 잡힌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도산 안창호는 피하지 못했다. 이 무렵 도산은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상해에 머물고 있었다. 두 달 전, 수당은 후동이를 데리고 도산에게 인사를 갔다. 임정이 분열되고 도산이 미국으로 떠난 지 10년만이었다. 도산은 동농의 손자를 잘못 대접했다가는 지하에 계신 어른에게 경을 칠 거라며, 후동이에게 초콜릿을 사주었다.
사실, 도산은 테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윤봉길의 거사도 몰랐다. 당일, 도산은 소년동맹 단장 이만영을 만나 후원금을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도산은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어린아이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독립운동이냐며, 그의 집에 갔다가 그만 왜경에 붙들리고 말았다. 도산은 국내로 압송되었고,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윤봉길 의사 순국 당시 모습. 사진=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제공]



# 상해 탈출
잠적한 백범은 도산 체포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교포사회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었다. 백범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는 모두 자신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이 결행한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이 나오자, 백범은 동포들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에서도 항일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가 임시정부, 나아가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계기였다.
왜경은 임정 관계자 전원을 상대로 체포 작전을 개시하고, 백범 체포에 현상금 20만원을 내걸었다(곧이어 60만원으로 올렸다). 수당은 짐을 챙기고 상해를 떠날 준비를 했다. 성엄은 백범을 보좌하며 먼저 자취를 감췄다. 그날 저녁, 수당은 일파 엄항섭의 가족과 함께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의 도움을 받아 가흥(嘉興)으로 탈출했다. 석린(石麟) 민필호(閔弼鎬)가 안내했다. 석린은 예관 신규식의 사위로, 훗날 고려대학교 총장이 된 김준엽의 장인이다.
가까스로 가흥에 자리를 잡은 지 두 주일쯤 지나서, 성엄과 일파가 백범을 모시고 도착했다. 백범이 무사한 모습에 모두들 안도했다. 더 이상 조계의 보호는 받을 수 없다. 중국정부가 임정을 동정한다 해도, 전쟁 한복판이다. 임정 식구들의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했다. 임정의 간판을 품에 안고 중국대륙을 떠도는, 15년 유랑 세월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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