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이 되었다. 홍안(紅顔)의 젊은 부부는 어느덧 삼십대가 되었다. 임시정부를 따라 풍상(風霜)을 맞은 세월이 벌써 10년. 앳되기만 하던 수당의 얼굴에도 음영(陰影)이 비쳤다. 석오나 성재 같은 분들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었고, 그들의 노안에 패인 주름살이 늘수록 독립의 희망은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레닌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한국 독립에 동지적 애정을 표시하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나서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임정에 동정적이던 쑨원마저 사망했고, 설상가상,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로 대륙은 내전에 휘말렸다. 중국국민당은 공산당을 때려잡기 위해서라면 항일전도 미루겠다는 식이었다. 국제정세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6․10만세운동(1926)과 광주학생운동(1929)이 없었다면, 고국에서는 독립운동의 명맥이 끊긴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최후로 시도된 좌우합작 항일결사 신간회(新幹會, 1927)가 결성되었으나, 우파의 동요와 좌파의 방관으로 변변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청산되었다.
# “누구시더라?”
시댁과 친정으로부터 손자를 보고 싶다는 편지가 올 때마다, 수당은 안타까웠다. 돌이 지난 후동이를 안고, 여섯 번째로 고국 땅을 밟았다. 장손을 보이러 오는 줄 뻔히 알았던지, 왜경도 뒤쫓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일제에게 조국을 빼앗긴 지 20년이 지났으니, 친정의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서울 인심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시더라?” 수당은 말문이 막혔다. 살면서 그런 무안을 당해본 적이 또 없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얼른 뒤돌아서는데, 안채에서 시부모가 쫓아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노인들의 손길을 뿌리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혹시라도 토라져 내뺐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 이끄는 대로 그 집에 잠시 들어갔다.
그날 저녁, 수당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가. 아니, 독립이란 무엇이고, 그 주인은 누구인가. 문득, 이세창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이는 누구를 위해 몸을 바쳐야 했던가. 수당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립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련다. 그것이 그가 해방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서울의 모습이었다.
# 임시정부, 새로운 투쟁에 나서다
국제정세 냉각에 따른 외교적 고립과 국내 독립운동의 침체는, 임시정부로 하여금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투쟁방식을 개발할 것을 요구했다. 자금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항일의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동포들과 세계만방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력으로 일제에 타격을 가하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조직적 테러는 의열단의 주도했다. 하지만, 윤세주를 비롯한 의열단 핵심 단원들은 중국 내전의 와중에서 중국공산당과의 연대를 선택했다. 홍군(紅軍)과 합세해, 중국 땅을 침범한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맞서 군사행동에 나선 것이다. 일제를 벌벌 떨게 만들 무장투쟁의 전선에, 불가피하게도, 공백이 발생했다.
임시정부는, 이념적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한민족 전체의 유일한 대표라는 점에서 스스로 중국 내전에 휩쓸릴 수는 없었다. 독자적인 위치를 고수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테러공작의 역할을 임정이 떠맡았다. 다만 임정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백범 혼자서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그 결실이 바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었다.
자기들 표현대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일본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선사한 호황의 거품이 꺼지면서 벽에 부딪혔다.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일본의 군부와 재계는 풍요로운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에 광분했다. 이미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출병해(1927, 1928) 침략의 마각을 드러냈던 일제는, 급기야 1931년 9월 19일,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 두 발
장제스는 자신과 형제의 맹세를 나눈 만주의 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일본군에 맞서지 말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만주는 구한말 이래 무장독립투쟁의 요람이다. 일제가 만주를 차지하자, 독립운동 근거지들은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만주에는 소수의 항일유격대만이 남아,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만주사변 두 달 전,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교외의 완바오산(萬寶山)에서 물길을 뚫던 조선농민과 중국농민 간에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일제는 이 사건을 만주의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는 빌미로 악용했다. 명백한 공작이었지만, 중국인들 사이에 반한(反韓)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남의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임정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백범의 첫 목표는 당연히 일제가 신으로 떠받드는 ‘천황’이었다. 한민족이 죽지 않았다는 본보기로 히로히토를 처단함으로써, 임시정부는 항일독립전쟁 개전(開戰)을 선언하려 했던 것이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단원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천황이 탄 마차에 수류탄 두 발을 던졌다.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다시 보게 되었다. 중국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는 “한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했다(不幸不中)”라는 제목을 붙여 대서특필했다. 약이 오른 일인(日人)들이 <국민일보> 사옥을 때려 부수었고, 일본해군 육전대(陸戰隊, 해병대)가 상륙해 상해를 점령했다. 그리고 4월 29일,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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