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다간 고인의 파란만장했던 92년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16일 최은희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고인의 가족들은 이날 최은희가 "병원에 신장 투석을 받으러 갔다 임종했다"고 전했다.
최은희는 이름만으로도 한국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여배우로 손꼽힌다. '마음의 고향'(194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등에 출연했으며 김지미, 엄앵란 등과 함께 1950대와 1960년대를 주름잡은 '원조 트로이카'로 불렸다. 출연한 영화는 130여 편에 이른다.
1953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했고, 이 작품을 통해 1954년 거장 故 신상옥 감독과 결혼해 영화인 부부가 됐다.
또 고인은 1965년 '민며느리'를 연출하며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감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기록도 있다.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신상옥 감독과 이혼 후인 1978년 1월에는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되기도 했다. 1978년 7월 신상옥 감독도 납북됐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이들 부부는 북한에서 8년간 머무르며 ‘탈출기’ ‘소금’ ‘돌아오지 않는 밀사’ 등의 영화를 찍었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소금’은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최씨는 ‘소금’으로 85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최씨는 생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과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그는 “김 위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 ‘최 선생(최은희) 저(김정일) 어떻습니까.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면서 “강제로 잡아오긴 했지만 인간적인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또 “북한에 있을 때 (김 위원장이) 우리를 예술인으로 대우를 잘해줬고, 체제 찬양 영화 대신 예술영화를 만들게 해줬다”면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탔을 때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유가 그리웠던 부부는 1986년 북한을 탈출했다. 김 위원장에 최대한 협조하며 신뢰관계를 구축한 이들은 틈이 생기자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한공작원들을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신변 안전을 이유로 미국에 한동안 정착했다.
최은희의 수상기록도 화려하다.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3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2회 수상과 함께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는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도 활동을 이어왔다. 2001년에는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에는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 및 제작했다.
신상옥 감독이 2006년 4월 11일 먼저 세상을 떠난 가운데, 고인은 허리 수술 등 건강이 악화되며 임종 직전까지도 신장 투석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상균·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장지는 안성천주교 공원묘지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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