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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8선에서 방북직전 김구 일행.왼쪽 선우진 오른쪽 김구 아들 김신. 사진=위키백과]
그러나 백범의 한국독립당계와 우사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들은 “단정은 곧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했다. 2월, 우사의 주재로 열린 중도파들의 합동회의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고, 백범의 승낙을 얻어 백범과 우사 2인의 연서로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에 전달을 의뢰했다.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의 인도대표 메논 등은 이 제안에 의미를 부여하고 북한 측 회답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했고, 26일 국제연합 소총회는 미국대표의 제안에 따라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메논의 방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으로 분단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이를 환영했고(한민당은 축하국민대회까지 열기로 했다), 이에 맞서 백범은 “한국을 분할하는 남한단독정부도, 북한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면서, 통일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범과 우사의 서신에 회답을 주지 않았던 북한은,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백범과 우사는 북측의 제안에 단정의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음을 인식했으나, 전쟁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양행을 결심했다.
실제로 백범은 평양행을 앞두고 한국독립당 대표 환송연에서 “이번 북조선에 갓다오면 내뵐 것이 무엇이 잇을건가. 나는 공수래공수거가 아닌가? 나로서 의구심이 업지도 안타”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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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22일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백범 김구.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백범과 우사는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이른바 ‘4김회담’을 두 차례 갖고(26일,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는 △외국군대 즉시 철거 △내전 불가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 △남조선 단독선거 결과 불인정 등의 내용을 담은 4개 항의 결정서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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