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있는 제품을 단순 유통시킨 판매업체도 책임을 져야 할까. 인체에 치명적인 성분이 함유된 가습기 살균제를 유통한 마트, 병행수입된 명품백이 가짜인 줄 모르고 판매한 백화점 등 유통사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의외로 판매업체의 과실로 사고가 확대되는 경우가 많다.
'가짜 백수오'를 유통한 판매업체들에 대한 책임 수준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법원이 가짜 백수오를 제조·판매한 기업들은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또 내놨다.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유석동 부장판사)는 가짜 백수오 피해자 500명이 내츄럴엔도텍 등 제조사와 CJ오쇼핑 등 홈쇼핑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원고는 “제품에 백수오가 들어가지 않았거나 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품을 사지 않았을 것”이라며 백수오 제조·판매업자들에 4억8000여만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2015년 ‘가짜 백수오 사태’ 이후 백수오 구입 피해자들이 받은 두 번째 패소 판결이다.
지난해에도 가짜 백수오 소비자 237명은 “제조업체가 가짜 백수오 성분인 이엽우피소를 고의로 넣었고, 판매업체는 원료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채 판매에만 급급했다”며 2억1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해당 혐의에 대한 증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짜 백수오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은 관련 사태가 불거진 2015년부터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백수오는 갱년기 여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안면홍조, 손발 저림, 불면증, 신경과민 등의 증상을 완화해주는 건강기능식품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국소비자원이 시중에 유통 중인 32개 백수오 제품에서 가짜 원료인 이엽우피소가 검출됐다고 밝혔고, 검찰과 식약처 조사결과 이같은 주장은 사실로 밝혀졌다.
해당 소송 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관계자는 "판결문을 받아봐야 패소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소송은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법이 판매업체에만 관대함을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판매업체의 관리감독 의무를 폭넓게 해석한 판결도 있다. 실제 법원은 유통업체의 판매행위도 피해자의 권리를 직접 침해할 수 있다는 판결을 최근 내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60부는 A씨가 코스트코코리아를 상대로 낸 디자인권 침해금지 등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A씨는 2010년 내용물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다용도 수납함을 만들어 디자인을 출원했고, 2012년 디자인 등록도 끝냈다. 코스트코는 2012년부터 A씨 디자인과 유사한 B사의 수납함을 납품받아 판매했는데, A씨는 코스트코가 디자인권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코스트코는 “단순한 유통업체로서 A씨의 디자인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판매에 고의나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판매한 제품이 등록디자인 권리범위에 속하며, (코스트코의)주장을 정당화할만한 사정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제품을 납품받아 판매했을 뿐인 유통업체의 권리침해를 인정한 판단이다.
이와 관련 법조계 관계자는 "고의성이 없더라도 위법한 물건이 시중에 유통됐다면 판매자에게도 관리, 감독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며 "이런 경우 제 3자가 유통한 물건의 형태, 과실여부, 고의성, 사회적 영향 등에 대한 꼼꼼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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