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직전,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군사적 원조는 필요치 않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해 인민군의 허리를 자를 것에 대비하라고 충고하면서, 인민해방군 25만명을 압록강 국경에 대기시켜 놓았다. 이때가 7월말(키신저, <중국 이야기>).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펼친 미군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대한민국 요인 및 군인 10만명의 일본 철수 계획을 짜고 있던 시점이었다(<정일권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전비(戰費)로 무려 4조 달러를 썼다(현재 화폐가치 환산,
‘애치슨라인’ 발언으로 남침의 빌미를 제공했던 딘 애치슨은, 전쟁이 끝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국을 살린 게 아니라) 사실, 한국이 우릴 살린 겁니다.”(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전쟁은 500만이 넘는 목숨을 삼키고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에게는 축복의 시작이었으나, 우리 민족과 수당에게는 고난과 저주의 나락이었다.
#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피난을 가야 한단 말인가
미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성엄이 이미 북으로 끌려간 뒤다. 이승만 정부는, 도망갈 때 시민의 생명을 내팽개쳤던 것처럼, 돌아와서도 시민의 생계를 돌보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수당은 헌옷가지들을 주워 모아 머리에 이고 나섰다. 그이처럼 영리하고 당찬 사람이 장사엔 소질이 없었다. 온종일 시장바닥을 누벼도,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하던 미군은 평안북도의 산골짜기에서 중국군의 매복에 걸려 대패했다. 정부는 국군이 사리원에서 중공군을 격퇴했다고 발표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웃들은 피난보따리를 쌌다. 피난생활이야 이골이 난 몸이다. 그러나 수당은 떠날 수가 없었다. 여길 뜨면, 성엄과 영영 헤어지게 된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피해야 한단 말인가….
민세 안재홍의 집을 찾았다. 낯선 청년이 무슨 용건이냐고 묻는다. 안채에는 뜻밖에도 민세의 부인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흥곤이라고 아시지요? 그 사람이 지금 서울에 와 있어요. 혹시 바깥분 소식을 알지도 모르니, 한번 만나보시겠어요?” 수당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김흥곤은 동란 직전까지 소앙의 비서로 일했다. 그는 자신이 성엄 등과 함께 평양까지 동행했다면서, 지난 석 달 동안의 일을 들려줬다. 수당의 귀에는 성엄이 무사하다는 말 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마웠다. 그러나 더 마주앉아 있기는 거북했다. 그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 수당은 남에 남은 사람. 분단은 그렇게 옛 동지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거 가지고 가시지요. 아주머니 드리려고, 서울 올 때 개성에서 산 인삼입니다. 반 근밖에 못 샀습니다. 달여 드세요.” 수당은 사양했지만, 그는 한사코 인삼꾸러미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얼마 뒤 김흥곤은 평양으로 떠나며,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아들 자동이와 조카 석동이가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있다. 수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당의 일생에서, 그 순간만큼 처연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2월 10일, 국군이 다시 서울에 들어왔다. 자동이가 달려왔다. 모자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부대로 돌아간 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 7월, 미군과 중국군이 휴전을 논의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것으로 정녕 끝인가. 아니었다. 그해 추석. 수당은 포승줄에 묶인 몸이 되었다.
죄목은 부역죄. 피난 안 간 게 죄란 말이냐. 30년 전, 왜놈 고등계 형사에게 붙들려 취조를 받던 종로서. 해방된 조국에서 수당은 손찌검까지 당하며, 모욕적인 취조를 받았다. 경찰은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골탕을 먹여야겠다는 듯이 덤벼들었다. 수당은 옥에 갇혔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에게 직접 듣는 게 도리일 듯하다.
# 회한과 절망으로 빛바랜 해방조국 40년
6․25는 이 나라의 땅덩어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신마저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런 6․25는 내게 처참하거나 극악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슬그머니 성엄을 빼앗아 갔고, 맹랑하게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겁 없이 국경을 넘나들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한 달 간의 그 차가왔던 마룻바닥이 내 가슴마저도 식게 만든 것이었다.
전운이 걷힌 다음해, 나는 쉰다섯의 나이였다. 나는 아직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지만, 사회에서 내가 할 일을 찾지는 못했다. 휴전을 한 획으로 삼아 내 주변을 정리해 보았으나, 나는 이제 뒷전에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사에 대한 관심만큼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관심이라는 것은 찾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내가 가지고 태어난 소질이고 본능 같은 것이었다. 관심은 때와 필요에 따라 열고 닫는 문이 아니라 항상 세상과 잇대어 있는 끈인지도 모른다.
나는 6․25 전과 마찬가지로 6․25 후에도 그런 끈을 세상과 이어놓은 채 살았다. 허망한 명예나 이름을 바라서가 아니었고, 알량한 재력이나 권력에 미련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지내온 날들과 연결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끝나는가를 똑똑히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내 땅에서 맞이하는 내 나라의 아침은 춥고 쓸쓸한 것이었다. 자유당정권의 물불을 못 가리는 부패상은 3․15 부정선거로 귀착되었고, 결국 4․19의 열기도 잠깐, 5․16이 뒤를 이으면서 유신으로 뻗쳤고, 마침내는 그 정권도 끝이 좋지 못했다.
5․16 직후 언론인 다수가 박 정권의 초빙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출세가도를 달릴 때 아들 자동이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자동이 스스로가 거절했다. 아마 아들이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서서 말렸을 것이다. 자동이가 언론계 일선에서 물러난 후 손을 대었던 소규모의 여러 사업은 모두가 신통치 않았고, 우리집은 셋방살이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야 했다.
(본문의 세 번째 절은 수당이 생전에 남긴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장강일기> p315~316)
# “역사를 바로 알기를”
“내 몸 속에 투쟁가나 혁명가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는 내 과거의 행적에 대해 뉘우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보고 듣고 겪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 바람은 이 글이 특히 젊은이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것이다. 바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죽음을 4년 앞둔 1987년. 수당은 자신의 회고록 <장강일기>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당신의 구십 평생에 스스로 바치는 만가(挽歌)임과 동시에, 후대에게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절절한 당부였다. 이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친다. (독자 여러분, 그리고 사진과 자료를 제공해주신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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