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구에 사는 직장인 강모씨(36)는 지난해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했다. 분양받은 아파트의 계약금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강씨는 "퇴직연금이 노후 준비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며 "그렇지만 은행에서 대출받아 이자를 지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 '노후 필수품'인 퇴직연금을 중도해지한 10명 중 6명은 주택을 마련하거나 전·월세 자금에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이 27일 발표한 '2017년 상반기 퇴직연금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주택 문제로 퇴직연금을 해지한 사람은 2만6323명이었다. 이는 전년 총 중도인출자 수(4만91명)의 절반 이상(65.7%)에 해당된다.
구체적으로 주택 구입 목적으로 퇴직연금을 해지한 사람은 39.6%(1만420명), 주택 임차보증금을 마련하고자 해지한 사람은 22.2%(5852명)에 달했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2016년 9월 기준 624만명에 달한다. 전체 근로자의 절반을 웃도는 수치다.
과거의 증가 추세는 2015년 2만8080명에서 2016년 4만91명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2만6323명으로 집계돼 하반기 중도인출자까지 더해질 경우 최소 4만명에서 최대 5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퇴직연금 가입 연령대는 30대가 31.0%로 가장 많았다. 그 뒤로 △40대(29.3%) △50대(20.0%) △20대(13.2%) △60세 이상(6.3%) △20세 미만(0.2%)의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30대 가입이 크게 줄었다. △20세 미만 1337명 △20대 3260명 △30대 2만5690명이 감소했다. 반면 △40대 3324명 △50대 2만9941명, △60세 이상 2만1137명이 증가했다.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금을 회사가 아닌 금융회사에 맡기고 근로자가 퇴직하면 이를 일시금 또는 연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금융회사에 맡기는 이유는 회사가 도산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도 근로자는 금융회사로부터 퇴직급여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으로 적립된 금액(지난해 6월 기준)은 151조원으로 집계됐다. 퇴직연금은 유형별로 확정급여형(DB)이 66.4%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확정기여형(DC) 24.1%, 개인형 퇴직연금(IRP) 9% 순이었다.
DB형은 회사가 퇴직급여 재원을 외부 금융회사에 적립해 운용하고 근로자가 퇴직할 때 정해진 금액을 지급받는 방식이다. 근무 마지막 연도의 임금을 기준으로 퇴직연금이 지급되므로 임금상승률이 높고 장기근속이 가능한 기업의 근로자에게 유리하다.
DC형은 회사가 매년 임금총액의 일정 비율을 적립하고 근로자가 적립금을 운용해 운용손익이 근로자에게 귀속되는 형태다. 임금상승률이 낮거나 임금피크제에 진입한 근로자 등에게도 유리한 방식이다. DB형은 중도인출이 불가능하지만 DC는 가능하다.
IRP형은 퇴직한 근로자가 퇴직할 때 수령한 퇴직급여를 운용하거나 재직 중인 근로자가 DB, DC 이외에 자신의 비용 부담으로 추가로 적립해 운용하다가 연금 또는 일시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이렇듯 퇴직연금은 은퇴 후 필요한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퇴직연금이 주택비 마련 등을 위해 과도하게 중도 인출돼 연금재원이 조기에 바닥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경희 상명대 글로벌금융경영학과 교수는 지난해 논문을 통해 "퇴직연금의 투자수익률이 낮고 주택가격 상승률이 투자수익률보다 높을수록 중도인출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수익률이 적은 퇴직연금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연금을 헐어 집을 사는 게 더 이익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근로자들의 안정된 노후 대비를 위해 중도인출 기준을 조금 더 엄격하게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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