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영상 큐레이터톡] 카라샤르 소조상 'Mixi'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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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성 기자
입력 2018-04-2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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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오다니 고즈이 수집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카라샤르 소조상]

카라샤르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옌치현에 있다. 이곳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이며, 과거 실크로드의 길목이기도 했다.

카라샤르는 서쪽으로 쿠차, 악소, 카슈가르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투루판, 남쪽으로는 둔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불교 문화가 융성해 많은 사원이 있었고, 4세기에서 7세기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이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많은 탐험대를 보내 유물을 수집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소조상(손으로 빚어 형을 만들어내 조각)에는 'Mixi'라는 손글씨가 써있고, 탐험대를 보내지 못했던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카라샤르 소조상이 있는 이유가 흥미롭다.
▶중앙아시아는 어디?

중앙아시아라고 하면 말그대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이다.
타클라마칸사막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과 서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 등 5개 나라가 위치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중앙아시아 유물은 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출토됐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유물 수집배경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앙아시아로 탐험대를 보냈다.

과거 이 지역은 중국에서 서북인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경우지였고 불교문화의 전파지였다.

20세기 초에 중앙아시아는 청나라 영토인긴 했지만 인접해있는 러시아가 남아 정책을 폈고, 당시에 인도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러시아와 영국의 대치 속에서 군인들의 탐색이나 지도작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지역을 많이 방문했다.

그때 다른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5세기 문서가 발견되면서 여러 나라들이 학술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영국을 비롯해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웨된 텀험대들이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조사 하고 유물을 수집해 갔다.

그때 유물조사에 동참한 아시아의 유일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의 오다니 고즈이라는 승려가 유럽 열강들이 이지역에 탐험대를 보내는 것을 알고 불교유물을 가져오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했다.

오다니 고즈이는 1902년에서 1914년까지 3번에 걸쳐서 이지역을 조사를 했고 많은 유물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914년 오다니 고즈이가 주지로 있는 절에서 대규모 횡령 사건이 발생하고, 오다니는 결국 사임하게 된다.

오다니가 거점을 중국으로 옮기면서 많은 유물을 처분한다.

유물을 사들인 일본의 한 사업가는 당시 조선의 광산 산업에 진출하려는 목적으로 1916년 조선 총독부에 유물을 기증한다.

그 유물이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게 된다.

[세라피스상]


▶소조상에 쓰인 'Mixi'의 비밀

카라샤르 소조상 머리 뒷부분에는 'Mixi'라는 손 글씨가 써있다.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 작품 뿐만아니라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도 같은 글씨가 써 있다.

이 흥미로운 사실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초의 탐험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영국탐험대를 이끌었던 오랄스타인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탐험 했고, 유적들을 조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유적별 기호를 만들었다.

카라샤르 불교사원의 또다른 명칭은 밍오이(Ming-oi)이다. 밍오이는 위그로어로 백개의 방이란 뜻이다.

오랄스타인은 밍오이의 알파벳을 줄여서 'Mi'라고 표기하고, 11번째 방에서 나온 유물을 'Mixi'라고 구분했다.
즉 10번째 방의 유물은 'Mix'라고 표기했고 12번째 방의 유물은 'Mixii'가 됐다.

그렇다면, 왜 일본 탐험대가 수집한 유물에 오랄스타인의 기호가 써 있을까?

그것은 오랄스타인이 먼저 유물을 발견하고 그 중에서 중복됐거나, 유물적 가치가 떨어져 놔두고 간 것을 일본 탐험대가 와서 수습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 탐험대는 1902년에서 1904년까지 1차, 1908에서 1909년까지 2차, 1910년부터 1914년까지 3차 탐험을 했다.

오랄스타인이 1907년에 이 지역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유물은 이후에 갔던 2,3차에서 발견한 것이다.

[중앙아시아 보살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유중인 중앙아시아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중앙아시아 유물은 크게 회화부분, 조각부분, 부분출토품 이렇게 나누서 전시 되고 있다.

투루판과 호탄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많고 다른 지역은 조금씩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길을 서역남도, 북쪽길을 서역북도라고 한다.

투루판과 쿠차 사이에 위치한 카르샤르는 큰 오아시스 도시는 아니지만 중앙 기점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르샤르는 서역남도에서도 동쪽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소조상을 만든 재료

불교조각은 그 지역에서 가장 흔한 재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나무도 돌도 없는 중앙아시아에서는 주로 흙으로 소조상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흙만 가지고 만드는 것은 아니라 흙들끼리 잘 뭉쳐있을 수 있게 지푸라기를 잘라서 쓰거나 동물 털을 섞어서 재료를 만들었다.
뼈대와 기본틀을 사용해 거친형태를 만들고 가장 표면에는 조금 더 고은 흙을 입히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중앙아시아 소조상]


▶카라샤르 불교사원의 소조상

카라샤르 소조상은 안쪽보다 바깥에 덮고있는 표면이 더 매끄럽다. 표면을 가장 매끄러운 흙으로 바른 것이다.
소조상은 약간 흰빛을 띈다. 흙에 석회나 모래를 섞어서 더 흰빛이 나게 했다. 지금은 색이 많이 없어졌지만 채색도 했다.

소조상의 얼굴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봐서 틀에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래서 소조상은 굉장히 손쉽게 다량으로 만들 수 있었다.

대부분의 소조상이 갑옷을 입고 꽉 조여 매는 헬멧을 쓰고 있어 군사나 무사로 여겨진다.
무사의 얼굴을 보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뜨고 있고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무사상이 유난히 많이 발견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마왕의 공격을 표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성도를 하기 전에 마왕은 자신의 군대를 보내서 혼란을 준다. 갑옷을 입은 군인과 괴물들이 성도하는 순간을 덮치려는 그 장면에 군사들이 등장한다.

또 하나는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 그 사리를 각국의 왕들이 쟁탈하려는 다툼의 역사가 있다. 결국 석가모니의 사리는 8등분 됐고 쟁탈전에서 많은 병사가 등장한다. 그것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작품으로 남았다.

세라피스상이라고 해서 헬레니즘 시기(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기)에 유행했던 신의 모습도 서역남도 중심지의 하나인 호탄에서 발견됐다.

이는 서양 고대 지중해 문명이 중앙아시아까지 영향을 줬다는 흔적을 잘 보여준다.

세라피스상은 마치 제우스 신처럼 묘사됐다. 상반신은 건장한 남자의 나체이고 하반신은 천을 두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소조상은 헬레니즘 양식의 입체적이고 서구적인 얼굴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금 더 도식화됐고 단순화됐다.

이목구비가 중앙에 모여있는 모습들, 머리카락이 양쪽에 대칭을 이룬 모습들, 똑같은 패턴으로 선을 넣은 모습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중앙아시아 불상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도움말: 국립중앙박물관 김혜원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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