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대화, 이번에는 잘되겠지요.”
북한과 미국 사이에 쟁점이 워낙 크다는 점을 염려하는 김 회장. 며느리 김숙정 여사는 “김정은 위원장이 서로 대화를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면서, “어머님께서 통일을 그렇게 원하셨는데, 거기까지는 못 가도 이번에는 잘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둘째 손녀 김선현 오토그룹 회장은 오래된 일기장 꾸러미를 불태우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할머니 책장에 그게 꽂혀 있었어요. 오래된 노트였어요. 할머니 살아오신 얘기가 적혀 있었고. 어릴 적부터 들여다보고 그랬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게 얼마나 소중한 기록인지 느껴졌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할머니께서 그걸 태우고 계시는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그러시면서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수당은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군의 생사나마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으로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했고, 남북대화는 끊어졌다. 수당이 일기장을 불태운 건 그 무렵의 일이었을 게다.
둘째 손녀는 그 빛바랜 일기장 첫 장에 적힌 문장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첫 울음을 울 때 그 아이의 일생을 누가 알랴. 누가 짐작하겠는가.” 한문 밑에 한글로 해석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문장은 당신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조국의 기구한 운명을 돌아보는 만사(挽詞)였는지도 모른다.
수당은 고관대작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매운 걸 못 먹어서 백김치나 간장김치가 항상 상에 올랐다. 평생을 누군가의 수발을 받으며 살라는 친정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일기장 첫 부분에 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다. 하지만 딸은 대륙에 망명해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며 조국 해방과 독립에 청춘을 바쳤다.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수당은 아들의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아들보다 먼저 교과서를 펼치고 공부하던 어머니. 그 모습은 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할머니, 이게 무슨 글자야? 이건 ‘뫼 산(山) 자’란다. 산이랑 닮았지? 시냇물이 이렇게 흐르지? 그래서 이건 ‘내 천(川) 자’란다. 둘째손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독일어 교과서를 펴놓고 ‘아베체데’를 읊조리던 수당. 그게 그의 나이 일흔여섯 때였다.
증조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은 개화와 독립운동, 할아버지 할머니는 독립과 건국운동, 삼촌은 광복군. 아버지는 언론에 몸담았다가 번역을 하며 민주화운동에 일익을 담당했고, 딸들과 맏사위(곽태원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는 노동조합운동에 뛰어들었다. 온 집안이 4대에 걸쳐 사회운동에 투신한 셈이다.
“말리지 않았어요. 그게 말려서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어머님께서도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비판의식이 남다르신 분이니까요. 저도 배우고 따르려고 했는데, 부족해요. 어머님은 타고 나셨나 봐요.”
며느리 김숙정 여사 또한 딸들에게 둘도 없는 우군이었던 모양이다. 1980년 서울의 봄,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학교에서 밤샘 농성하던 둘째딸과 급우들에게 떡을 해 갖다 주겠다던 어머니였다. 집안 분위기가 여느 집과는 달랐던 거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라.” 둘째손녀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호주로 원정시위에 나설 때, 수당은 이렇게 말했다. 며느리 김숙정 여사가 그랬듯이 둘째 손녀 역시 인터뷰를 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가족에게, 수당은 그리운 할머니, 정신적 지주 등의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은 이 집안의 가족사와 우리의 근현대사가 교직해낸 어떤 신성불가침의 운명과도 같은 게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민족이란 큰 집이다. 동포란 한 배에서 태어난 자식들 아닌가. <상록수>를 쓴 심훈의 “더 크신 어머니”는 그런 맥락일 것이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처럼, 수당 정정화는 이 가족의 어머니만이 아닌 독립의 어머니였다.
할머니를 가장 닮았다는 둘째손녀 김선현 오토그룹 회장은 창립한 지 15년이 지난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든든한 후원자다. 임시정부와 우리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리는 사업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그의 작은 바램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자동 회장과 가족들은 귀한 지면을 내준 <아주경제>와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