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율의 연기 욕심은 이미 그의 필모그래피로 증명됐다. 만인의 연인(tvN 드라마 ‘식사를 합시다2’)부터 올곧은 신념을 가진 인물(영화 ‘명량’), 허점투성이 허세남(영화 ‘최악의 하루’), 악랄한 조직폭력배(영화 ‘미옥’)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넘나들며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해왔다. 캐릭터로 인하여 장르의 맛을 알게 된 그는 조금 더 과감하게 장르적 변화를 취하기 시작했고, 캐릭터를 넘어 장르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1일 개봉한 영화 ‘챔피언’(감독 김용완)은 심장보다 팔뚝이 먼저 뛰는, 타고난 팔씨름 선수 ‘마크’(마동석 분)가 마음보다 잔머리가 먼저 도는 남자 ‘진기’(권율 분), 그리고 갑자기 아이들과 함께 등장한 ‘마크’의 여동생 ‘수진’(한예리 분)의 도움을 받아 챔피언 도전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권율은 마크의 스포츠 에이전트 진기 역을 맡았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임기응변 능력과 잔머리만큼은 따라올 자가 없는 캐릭터. 앞선 영화 ‘잉투기’, ‘최악의 하루’ 속 유머 코드를 띤 인물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코미디 장르가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권율은 장면이나 연기가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마동석에게 묻고 또 의지하곤 했다.
“워낙 경험치가 많으시잖아요. 형이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플랜A부터 D까지 다 짜놓고 검사를 맡는 거죠. 하하하. 형은 대충 보는 것 같으면서도 통찰력이 있어서 예리하게 짚어주세요. ‘그게 재밌겠다’, ‘이렇게 해보자’하고 같이 만들어주셔서 의지를 많이 했어요. 선배님만의 코드가 분명 있고, 대중이 어떤 유머 코드를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아셔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진기의 유머 코드는 리드미컬한 대사 톤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만큼 많은 양의 대사와 독특한 리듬을 구사해야 했다.
“대사 숙지가 가장 큰 문제였어요. 특히 상대방(마크)이 대사가 적어서 진기가 전달해야 하는 정보가 많았거든요. 왜 우리가 브로커를 만나야 하고, 왜 대회에 참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지 진기가 말로써 전달해야 했어요. 대사량도 너무 많은 데다가 현장에서 추가되는 것, 삭제되는 것도 생기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정말 랩처럼 외웠어요. 하하하. 현장에는 늘 마음을 비우고 갔죠.”
진기는 그야말로 입체적인 캐릭터다. 마크와 수진을 도우려는 마음에는 조건 없는 ‘선의’가 아닌 자신의 이익 추구가 베이스로 깔려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진기는 자신을 위해 일하지만, 마크의 진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성장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매우 섬세하고 진지한 작업이었다. 자칫하면 진기 캐릭터가 밉상으로 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진기 캐릭터를 호감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족에 대한 부분, 현실적인 부분을 강조하려고 했어요. 진기 캐릭터 자체로는 과장되어 보일 수 있겠지만 그가 가진 상황은 매우 현실적이거든요. 진기가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는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집이 망해서 이럴 수밖에 없어’, ‘경제적으로 무너지면서 모두를 잃었어’라는 식으로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길 바랐어요. 밉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죠. 극 중 내내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오던 진기가 어느 순간 코트를 벗어버리는데 그것이 성장의 오브제이길 바랐어요. 허세를 벗고 성장하는 모습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마크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진기를 이해하고 해소될 수 있기를 바랐어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근래 권율은 귀여운 ‘허세’를 가진 인물들을 표현해왔다. “왜 이런 캐릭터가 권율에게 오는 걸까?” 그는 멋쩍게 웃으며 “허세가 많아서 그런 걸까요?” 되물었다.
“사실 그런 캐릭터가 (연기할 때) 재밌긴 해요. 남자들은 다 허세를 부리는 걸 좋아하거든요. 어쩌다 보니 그런 캐릭터를 많이 연기하게 되었는데 실제 삶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제 생각보다는 타인이 보는 이미지, 모습이 있기 때문에 상반되는 어필을 하기도 하고요. 어느 정도 즐기는 캐릭터기도 하고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죠.”
‘허세남’ 이전엔 분명 ‘밀크남’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로 여심을 사로잡는 역할을 맡아왔다. 밀크남에서 허세남으로 그리고 악역까지 자유분방하게 오갈 수 있었던 건, 권율의 노력과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데뷔할 때부터 ‘밀크남’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아요. 외모적인 부분 때문에 저를 곱상하다, 깍쟁이 같다고 생각하시는데 의외로 저는 털털한 편이거든요. 젠틀하고 나이스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지만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도전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캐릭터, 연기 욕심이 많거든요. 도전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선택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연기적인 욕심은 자연스러운 이미지 전환으로 이어졌다. 권율은 “이번 영화를 통해 코미디를 공부하게 되었고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며, ‘챔피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맡고 도전하고 확장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꾸준한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작품을 통해 습작하지 않으려고 해요. (영화를) 돈 주고 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들의 기대치는 분명 충족해야 하니까요. 무조건 확장에만 무게를 두지는 않아요. 충족시켜드릴 수 있는 것을 기본 베이스로 가지고 있되 조금씩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적인 욕심만큼이나 작품을 바라보는 스펙트럼도 넓었다. 스스로를 “짐 캐리·주성치 영화 세대”라고 말하는 그는 코미디 장르에 대한 욕심과 기대를 드러내면서도, 마동석이 ‘오버 더 톱’을 보고 ‘챔피언’을 기획한 것처럼 로망을 가진 영화로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SF·판타지 영화”를 꼽기도 했다. 로망을 실현하고 제작할 수 있다면 “휴머니즘을 강조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장르와 취향을 꿰뚫고 있었다.
“만약 제가 영화를 기획할 수 있다면 휴머니즘을 강조하고 싶어요. 제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휴머니즘이 모든 영화의 기반이 되는 것 같아요. 판타지도 SF도 액션도 좋지만 사람 냄새 나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를 기획해보고 싶어요.”
조금씩 확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권율. 그에게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지 묻자 “여러 부분으로 열어두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도전하고, 달려들고 싶은 영화를 찍고 싶어요. 요즘 연기하는 게 어려울수록 그 과정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힘들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런 작품들이 심장 박동을 뛰게 만드는 것 같아요. 다만 너무 무모하지는 않게요. 도전을 위한 도전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많은 분에게 실례일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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