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영화 '청연'의 박경원과 권기옥
2005년 겨울 개봉 영화 '청연(靑燕)'은, 이 땅의 여성비행사 이야기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주인공 박경원은 언덕에서 커다란 새(비행기)를 보고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꾼다.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를 다니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택시운전을 했다. 택시운전을 할 때 손님으로 태운 승객은 남자 주인공 한지혁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부모의 만류에 뜨거운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1925년 그녀는 첫 비행을 마치고 2등 비행사가 된다. 지혁 또한 비행사가 되지만 둘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한다. 하늘을 날고 싶은 경원의 꿈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영화다. 박경원 역을 맡은 배우 장진영은 4년 뒤인 2009년 위암으로 타계해 큰 충격을 주었고, 김무생의 아들이며 영화에서 한지혁을 열연했던 배우 김주혁은 작년인 2017년 교통사고로 눈을 감았다. 두 주연배우를 잃은 영화 '청연'은, 홀로 하늘을 떠도는 푸른 제비처럼 고독한 느낌으로 남았다.
여기부터는 현실이다. 영화 '청연'은 실제 역사 속에 있었던 인물 박경원(1901-1933)을 복각한 작품이었다. 대구 출신인 그는 1922년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을 본 뒤 매료되고 말았다. 2년 뒤인 1924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간호사와 운전기사를 알바로 뛰면서 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2등비행사 자격을 얻은 뒤 일본 체신장관(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 박경원과의 염문설이 있다)의 지원으로 비행기를 불하받았다. 그 비행기에 붙인 이름이 청연(靑燕, 푸른 제비)이었다.
1933년 박경원은 안창남처럼 고국비행을 할 기회가 왔다. 일본의 만주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조선-만주를 비행하는 이벤트 행사였다. 박경원은 일장기를 흔들면서 청연에 올라탔고 짙은 안개 속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으나 1시간 만에 일본 시즈오카 겐가쿠산 중턱에 추락한다. 그에게는 다만 비행기의 '자유'만 있었지, 조선의 자유 같은 개념은 없었던가. 33세의 나이로 추락사한 그는, 일제의 홍보물로 산화하고 말았다.
# 중국 창공에 조선의 거대한 날개가...
많은 이들은 박경원을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알고 있었다. 중국군 항공대 소속이던 권기옥보다 2년 늦게 비행기를 탔지만, 일제의 비행기를 탄 그녀는 유난히 부각됐다. 당시부터 최근까지 언론은, 박경원에게 '최초'라는 월계관을 씌웠고 33세 요절의 짧은 삶에 감회를 더하며 역사를 잘못 써왔다. 영화 '청연'이 개봉되면서 최초 여성비행사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오히려 진짜 '최초'이자 오직 독립투쟁에 헌신한 삶을 살아간 한 여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 사람이 권기옥이다.
일장기를 흔든 박경원의 말은 "경계도 없고 신분 고하도 없는 창공을 날고 있노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였다. 조선 독립투쟁에 헌신한 권기옥은 비행기를 타면서 "내가 비행기를 타는 까닭은 일본 심장부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그곳을 폭격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권기옥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까닭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1926년 5월21일자 동아일보는 이런 뉴스를 전하고 있다.
"중국 창공에 조선의 거대한 날개(鵬翼, 붕익), 중국 하늘을 정복하는 조선용사 그 중에는 꽃같은 여류용사도 있어. 안창남, 최용덕, 여류비행가 권기옥 등 국민군에서 활약"
조선의 붕익, 꽃같은 여류용사로 표현된 사람이 권기옥(權基玉)이다. 1925년 3월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의 제1기 졸업생 권기옥.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馮玉祥)이 지휘하는 공군부대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복무했던 사람. 그 엄혹했던 시절에 어떻게 중국에서 여성으로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을까.
# 여학생 기숙사에서 태극기 만드는 소녀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1901년 1월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 152번지. 아버지 권돈각과 어머니 장문명의 슬하 4녀1남 중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조부 때에는 상당한 재산가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부친 대에 와서 유산을 모두 날려버렸다고 한다. 4살 때 그녀는 남의 집 문간방에서 살았고, 11살 때인 1912년엔 인근의 은단공장에서 일을 했다. 이듬해 소녀는 교회(장대현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소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학한다. 12세부터 18세까지, 그녀의 청소년기 학창시절은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해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수학선생인 박현숙은 그녀의 '의식'을 일깨웠고, 학교내 비밀결사대인 송죽회에 가입하도록 했다.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1919년 2월말. 숭의여학생 권기옥은 바빴다. 수학선생 박현숙은, 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목사,1872-1937)의 연락을 받고 학생들에게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도록 했다. 또 애국가 가사도 등사를 했다. 감시교사인 일본인 호시코(星子)가 밤낮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불안 속에서 일을 해내야 했다. 권기옥은 동기생들과 함께 대찰리의 어느 집 장롱 속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감춰뒀다. 그리고 2월의 마지막밤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치마 속에 그것을 숨겨 숭덕학교 지하실로 옮긴다. 숭덕학교는 그들의 거사 장소였다.
# 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에 나서다
3월1일 권기옥은 숭덕학교 교정에서 강규찬 목사의 개회선언과 김선주 목사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듣는다. 이후 곽건응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운동장에 있던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바로 교정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친다. 사흘 뒤인 4일 박현숙선생이 체포됐다. 학교 주변엔 경찰들이 깔렸는데 권기옥을 비롯한 20여명의 학생이 거리로 다시 뛰어나가 만세를 부른다. 며칠 뒤 그녀는 형사에게 붙잡혀 3주의 구류 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갇혔다.
이런 투쟁의 시간들이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권기옥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적극 가담한다. 임시정부 연락책인 임득삼, 김정직, 김순일, 김재덕 같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자금을 임정으로 송금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는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호소하기도 했다. 여학생들은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기도 했고, 어머니의 패물을 팔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권기옥에게 내놓았다.
#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을 당했지만
어느 날 평양청년회 김재덕이란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평양 근교 30리 밖에 권총이 놓여있는데 그녀에게 운반을 해달라는 간청을 한다. 기옥의 동생 기복이 자전거를 타고 가서 권총을 발목에 묶어 대님을 맨 차림으로 숨겨 왔다. 권총을 받아든 김재덕이 시험하다 총을 오발해 소리를 내게 됐다. 이 때문에 권기옥은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되는 일이 생겨난다. 일단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형사가 지속적으로 미행해 기옥이 한 총기 배달 행위를 밝혀낸다. 다시 체포된 그녀. 이번엔 간단치 않았다.
일제 경찰은 그녀를 유치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물을 부었다. 누구에게 총을 전달했는지 실토하라는 고문이었다. 기옥은 몇번이고 졸도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다나카 형사는 검찰에 송치되는 그녀의 조서에 "이 여자는 지독하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뤄야 한다"고 썼다. 다나카가 조서에 붙인 이 쪽지 때문에 그녀는 징역6개월을 선고 받는다. 한 소녀의 독립투쟁은 점점 더 매서워지고 있었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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