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권기옥②]전투기에 폭약싣고 일본을 폭격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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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T&P 대표
입력 2018-05-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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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최초 여비행사, 독립을 향해 하늘끝까지 행군한 삶

# 도청 폭파를 위해 폭약을 제조하다

19살 권기옥이 6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왔을 때, 그에게는 이전의 위험보다 훨씬 더한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이 소녀가 경험한 것은 독립자금 모금과 총기 배달과 같은 투쟁지원 활동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1920년 8월의 일이었다. 광복군 총영 소속의 독립투사 문일민(평남 강서 출신)과 장덕진(황해 재령 출신)의 전갈을 받았다.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할 것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도청 폭파는, 미국 국회의원단의 방문에 맞춰 조선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
 

[권기옥의 일대기를 그린 연국 '비상']



기옥은 그들과 함께 숭현소학교 지하 석탄창고에서 폭탄을 제조한다. 소학교 수위가 뒤를 봐줬다. 며칠 뒤 도청에서는 폭파 거사가 진행됐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으나, 일제가 이 거사에 관여한 이들을 전혀 검거하지 못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 교회에서 여자밴드를 조직하다

이 무렵 그는 교회의 악단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 집회를 내세워 전국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투쟁을 조직화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평양 숭실학교의 브람스밴드 연주그룹의 리더 차광석은, 권기옥에게 여자 밴드를 만들어볼 것을 권한다. 그의 통솔력과 행동력을 눈여겨 봤기 때문이리라. 기옥은 평양청년회 여자전도회를 조직한다. 한선부, 차순석, 차묘석이 멤버였다.
 

[권기옥을 다룬 뮤지컬 '비갠 하늘'(대구시립극단)의 주연 장은주.]



여자전도회는 장대현교회에서 첫 전도회를 가졌고 평안도 일대를 순회 공연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 경찰은 전도대장이었던 기옥을 연행해 시말서를 쓰게 했다.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가 따랐다.

자신에 대한 재구속 영장이 이미 발부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도청 폭파 사건 직후인지라 불안감이 더했다. 기옥은 평양을 떠나기로 했다. 폭파사건에 가담한지 한달 뒤인 9월의 일이었다. 모터도 없는 건멸치 운송 목선(木船)을 타고 상해로 탈출한다. 그에게 전혀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 나무배를 타고 상해로 떠난 소녀

험난한 시절의 삶과 상황을, 현재의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에서 상상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을 벌이는 19세 소녀의 심경을 제대로 짐작할 수가 있을까. 평양을 떠나 나무배를 타고 노를 저어 상해로 탈출하는 그녀의 그 뱃전에 앉아 있어 보라. 엄습하는 불안과 흔들리는 미래에 대한 형언못할 기분을 감히 읽어낼 수 있겠는가. 시간과 상황을 번역하는 일은, 이렇듯 힘겹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는 소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그 시절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당시 상해로 떠난 사람은 혼자는 아니었고, 함께 활동하는 전도대원들이나 다른 동지가 있었던 듯 하다. 그들이 평양에서 보여준 투쟁 활약상은, 평양 관청 폭파 미션을 수행하러 왔던 임시정부 광복군 소속원들이 이미 상해에 전달했을 것이다. 상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 의장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 운명으로 다가가는 그녀

2년 뒤 기옥은 남경의 홍도 여자중학을 찾아간다. 그 학교는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고 있었고 한국인 80명이 학생으로 있는 곳이었다. 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1889-1976)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그는,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옮긴다. 1922년의 일이었다. 홍도여중 생활은 그녀에게 외국어(영어)에 눈뜨게 해줬다. 1923년 우등생으로 졸업을 한다. 

임시정부는 그녀의 재능과 가능성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당시 임정은 독립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군 지휘관의 양성이 필요했다. 1923년 4월 임정의 추천서를 쥔 그는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한다. 이제 막 출범한 학교의 제1기생 학생이었다. 그가 여성으로서 항공학교에 입학한 것은, 단순히 임정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6년전 보았던 놀라운 장면이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 여의도 비행장의 스미스처럼 되리라

1917년 9월 평양 비행장에서 소녀 권기옥은 미국의 곡예비행 전문가인 스미스가 하늘에서 새처럼 나는 것을 눈부시게 바라보았다. 이 비행은 당시 조선 사회를 흔들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다. 천 마디 말이 필요없는, 근대과학의 현장 학습이었고, 인간이 새가 될 수도 있다는 동경을 저마다의 가슴에 심었다. 그 꿈이, 기적같이 중국의 변두리에 있는 학교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엄혹하던 시절, 절망만이 메아리치던 식민지 땅에서 태어난 한 소녀가, 온갖 질곡을 훌훌히 벗고 날아오르는 이 장면은 지금 생각해봐도 감격적인 풍경이다.
 

[운남육군항공학교 시절, 교관과 함께 포즈를 취한 권기옥.]



그와 함께 입학했던 조선인으로는 이영무, 장지일, 이춘 같은 이가 있었다. 운남육군항공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비행기 20대가 있었고, 프랑스인 2명이 초빙 교관으로 와 있었다. 여성으로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권기옥은 힘겨울 때 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1935년 권기옥(왼쪽 두번째)과 이탈리아인 교관과 중국 여자비행사 이월화.]



# 비행기를 타는 뜻은, 폭탄을 싣고 일본으로 날아가기 위한 것

"내가 이곳에 와서 비행기를 타려는 뜻은, 그저 개인적인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필요 없다. 비행기 운항을 배우는 까닭은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다. 비행기 안에 폭탄을 싣고 장차 일본으로 날아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기초 이론과 지상 실습을 거친 다음, 그는 마침내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 훈련기를 타보았다. 자신의 조종으로 비행기가 허공에 떠오르고 마침내 비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당시 조선인이 이런 감격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식민지에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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