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다. 이제막 비핵화를 위한 첫발을 뗀 셈이다. 기대가 크지만 그만한 우려도 따라붙는다. 앞으로 걸어갈 길이 멀고 험난한 까닭이다. 북한에는 100여곳의 핵과 미사일 시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해 비핵화를 진행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더욱이 북한의 비핵화는 기술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북한의 절대적인 협조가 없으면 비핵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핵무기 타국 양도나 직접 해체 이어질 듯
과거 추진됐던 북한의 비핵화 과정을 살펴보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중단 △핵·미사일 개발 동결 △핵 프로그램 신고와 사찰·검증 △핵·미사일 시설 해체 △핵·미사일 국외 반출 등을 북한이 추진하면 미국이 단계에 맞춰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 조기에 성과를 드러낼 수 있도록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단계를 뛰어넘어 북한이 보유한 핵탄두, 핵물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국외 반출을 곧바로 이행하라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선 전인 2020년까지 북한 비핵화에 대한 성과를 내겠다는 것과 함께 제네바 합의, 9·19공동성명 등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수차례 무위로 돌아갔던 이전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중을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내달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될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이미 완성한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 양도할 것인지, 아니면 직접 해체한 뒤 이를 국제사회가 검증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1991년 구소련의 붕괴로 핵무기를 물려받아,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됐던 우크라이나는 수년에 걸쳐 미국·러시아와 협상을 벌인 끝에 1996년 핵미사일(ICBM) 176기와 1800여개의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에 넘겼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기를 직접 해체한 뒤, 국제사회의 사찰로 이를 검증했다. 남아공은 핵무기 6기를 1990년 2월부터 다음 해 중반까지 해체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그해 11월 사찰을 시작했고, 1993년 9월에서야 남아공의 비핵화 검증 절차를 마무리했다.
북한의 핵무기 폐기 공정은 IAEA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핵보유국이 북한과 협상 후 직접 담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북한이 현재까지 몇 기의 핵탄두를 보유했는지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한 이유다.
◆핵물질 반출 먼저, 핵시설 사찰 추후에···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핵물질 중 고농축우라늄(HEU)은 농도를 낮춰 무기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가능성이 크다. IAEA도 남아공 비핵화 당시 고농축우라늄을 폭탄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재주조(recast) 및 용해해 보관토록 했다.
현재 국제사회에선 고농축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20%이하, LEU)으로 전환하기 위한 고농축우라늄감축(RERTR)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고농축우라늄과 달리 플루토늄(Pu-239)은 발전용으로 재사용하는 게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북한에 그냥 둘리 없다. 이에 따라 북한내 플루토늄을 미국이나 중국 등 핵보유국으로 반출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구소련이 붕괴할 당시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미국에 양도한 사례가 있다.
북한은 현재 플루토늄 40~50㎏과 고농축 우라늄 600~700㎏ 이상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자로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 시설) △우라늄 농축 시설 △핵연료봉 제조 시설 △각종 핵실험 연구소 등에 대한 사찰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추후에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식 북핵 해법 전체가 완성돼야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현재로서는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핵무기 신고·사찰·폐기·검증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불가역적인 신뢰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고위급회담·군장성회담·적십자회담 등 북한과 신뢰를 쌓기 위한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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