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시시각각(時時刻刻)]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와 새로운 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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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선 기자
입력 2018-06-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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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아주경제 아세아중국연구소장·단국대 교수


중국이 1978년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하며 변화하고 있는지도 40년이 흘러간다. 중국이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영토 회복과 국내 통합에 힘쓰는 과정에서도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 명목으로 이듬해 10월 전면 개입했다는 것은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사고와 현실 정치적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은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에 신경을 썼지만,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어려운 경제 환경으로 문화대혁명(1966~1976년)이란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은 현재 중국의 지도자그룹을 포함한 장년들 대부분이 당시 대변동을 경험한 문화대혁명 세대라는 면에서 아직도 중국 정치, 문화,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추억에서 한국전쟁과 문화대혁명은 신중국 건국 이후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있는 상흔이자 교훈이다.

국가 건국 후 1여년 후에  참가한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을 지원함)이란 한국전쟁은 이들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역사 인식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중국 연속극의 단골주제인 항일전쟁,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은 아직도 중국인 기억 속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중국 역사의 현주소이자, 1895년 청일전쟁이란 역사의 기원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 및 현실 인식은 현재 한국과 중국이 대치되는 주 원인중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중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갖는 역사적 기원이란, 중국 대륙과 한반도라는 역사적 관계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 왕조의 패전으로 인한 중국의 한반도에서 영향력 상실이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확장한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하고 만주로 진출했으며, 이것은 중·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중국인에게 한반도는 역사적 기억과 근대 중국 정부의 위기를 자초했던 시초였다는 시대의식이 상존하는 곳이다.

또한, 사회주의 중국이 구소련과 벌인 코민테른 경쟁은 역사적 한반도 인식으로 연결돼 항미원조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국인의 역사인식은 현실 판단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북·중 관계를 보면, 중국이 문화대혁명기라는 사회와 경제의 암흑기에도 북한에 식량과 자원을 지원했다는 것은 중국이 한반도의 안전과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은 대혼란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반둥회의를 발판으로 1971년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위치에 올랐다. 미국과 교류도 시작하며 덩샤오핑 시대에 중·일 수교와 미·중 수교를 성사시켰다.

결국, 1960년대 중·소 마찰은 중국 국내의 혼란과 정치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중국으로 변화하는 동인이 됐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중국은 현재 북한의 의중이나 발전방향을 어는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북한의 변화와 발전방향 및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중국은 북한의 조언 및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종식으로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의 완전한 제거를 통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 중국의 경제적 변화는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장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잘 사는 중국, 국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국내 경제환경을 건설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의 사상, 정치, 군사에 힘써온 것에 대한 보완적 경제정책이 초점이었다는 말이다.

결국, 1989년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국민사상과 사회에 변화를 일으켰고,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2년 남순강화에서의 개혁·개방에 대한 천명과 꾸준한 정책은 결국 중국의 국제협상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중국은 1997년 홍콩과 1999년 마카오를 반환받으며 중국 여러 도시의 개방과 경제적 발전을 선도하였다. 또, 2008년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인들에게 중화민족 문화부흥의 자존심을 선포하는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홍콩·마카오 반환이나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인들의 강조하는 주제는 중화민족의 역사의식이란 점을 보면 중국의 현실 정치에서 역사의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국 정부의 문 앞인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기억과 국제 정치의 현실은 국가의 안위라는 정부의 핵심이익이 미·중 대결이라는 잠재의식과 동북지역 영토 안전이라는 역사의식과 중복돼 현실적 과제로 남게 된다. 중국에 있어 현실 국제정치에서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란 중국의 핵심이익이라는 안보관과 지역 안정,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란 역사의식과 중첩되며 현 정부가 방관할 수 없는 임무로 남는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사회주의자 이전에 전통적 중국인으로 역사의식을 중요시한다. 중국인들은 역사 속에서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으로 자존심을 잃었다. 중국인들이 아직도 시모노세키조약(마관조약)에 따라 일본에 넘어갔다가 이제는 양안으로 대립되어 있는 대만이라는 문제에도 상당히 민감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이는 중국인들의 역사관이 현실적 국제정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증명한다. 아마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이나 북한의 국민도 유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역사를 존중하고 은감불원(殷鑑不遠)하는 이유는 그들이 긴 역사를 갖은 중화민족이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는 변화의 역사에서 터득한 역사적 교훈이 우리의 유전자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핵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중국이 선도했던 6자회담이 현재 가동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 국제관계와 질서 및 영향력을 지리적 영토와 인구, 그리고 경제력에 기반해 생각해 본다면 6자회담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방법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안정과 번역을 위한 다자간 협력체제의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잠재력이 크다.

한반도가 중심이 되는 동북아 지형을 고려하더라도 6자회담은 비핵화, 안보 및 경제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역내 해당 국가 간 협력할 수 있는 중요한 시초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한반도 남쪽에서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미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과 접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후에는 각종 모임과 여러 장소에서 중국인들을 자주 접한다.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여러 국가가 서로 평화롭게 접촉하며 같이 번영하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추진되던 6자회담이 1955년 반둥회의에서 중국이 주장했던 ‘평화5원칙(영토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과 연계돼 변화가 나타나면 좋을 듯하다.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의식도, 현실 국제정치에서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 국제관계도, 동북아 관련국의 협의 틀 안에서 서로 공영을 위한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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