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소개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전종서는 내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이어가는 해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낯설고도 궁금한 존재. 영화 속 해미와 영화 밖 전종서는 기묘하게도 맞물려있다. 속내를 들여다보거나 짐작할 수도 없는 해미와 꾸밈없이 분방한 전종서가 이질감 없이 작품 안팎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전종서의 일문일답이다
드디어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조금은 속이 시원하겠다.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점이 있나?
- 있다. 영화 속 제가 공감한 부분들이 있다.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더 구체적이어진다. 영화가 실제 우리의 삶과 제 삶의 일부와 닮은 게 많더라. 제가 어떤 형태로 살아가고 있고 사는 곳, 시대가 어떤 색깔인지. 공감하고 찾아보면 보이는 게 더 많다.
영화 ‘버닝’은 모든 게 열려있다.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배우는 나름의 줄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벤이 성소수자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촬영 전 스티븐 연 오빠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그렇게 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정의할 수는 없다. 대화할 때 다 열어뒀다. 또 종수의 시선에서 본다면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의 개인적인 해석은 해미는 죽지 않았다. 그냥 사라진 거다. 다만 연기적으로 고민했던 건 ‘해미가 정말 벤에게 죽임을 당했을까?’였다. 해미 스스로 벤에게 제물이 되는 걸 선택한 게 아닐까? 두 가지 방향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스티븐 연 오빠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해미가 너무 사랑스럽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연기적으로 너무 어려운 작품을 데뷔작으로 둔 것 같다. 많은 부분을 열어둔다는 것이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 저는 오히려 답이 정해져 있고 공식이 있거나 정형화된 것들이 더 힘들다. 다행히 감독님의 스타일이나 배우들의 성향이 저와 잘 맞았다. 그들도 그쪽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인 것 같았다. 영화, 연기, 예술은 답이 없다. 범위가 넓지 않나. 제가 편하게 적응할 수 있는 현장은 분명 아니었으나 많은 분의 도움으로 배울 수 있었다.
어떤 것을?
- 처음엔 현장 용어도 잘 몰랐다. 슛이 무엇이고 컷은 무엇인지, 리허설은 어떻게 하는지. 심지어는 미술감독님이 뭘 하는 사람이고 조감독님은 무엇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헤어·메이크업을 도와주는 스태프들이 내 옷을 만지고 얼굴에 손을 대는 것을 인색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점차 그들도 ‘연기’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연기를 하고 있고 작품의 일부다.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거다. 이런 과정이 있다는 걸, 이전까지는 몰랐다. 영화를 보더라도 가장 핫한 건 배우니까. 그 배우가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길이 존재하는지 미처 몰랐다.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를 다닌 거로 아는데? 그곳에서도 ‘협업’은 존재하지 않나.
- 학교는 실망밖에 없었다. 입학하고 졸업하는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지 않나. 그런데 연극·영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수업을 듣는다. 왜 알아야 하는지 그 부분이 이해가 되어야 수용이 되는데 그런 게 없었다. 막연하게 꿈만 꾸는 사람들과 모여 있으니 더 혼란스러웠다. 학교가 도움을 주는 것도 분명 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대를 만들고 공연하는 수업은 학점에 반영이 안 되고 이론 수업만 학점에 반영이 됐다. 공연하는 건 너무 즐거웠는데 그 외 수업들에 필요성을 못 느꼈다.
이론보다는 실기에 갈증이 있었나 보다.
- 그랬다. 연기를 가르쳐줄 수 있는 선생님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다들 완성된 연기를 보여주고 따라 하라고 하더라. 이게 맞는 건가? 맛이 없었다. 그러던 중 결국 어떤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저 스스로를 정확하게 알고 탐색하는 작업을 가지라고 하더라. 그분 덕에 제가 어떤 아이인지 알게 됐다. 나의 결이나 감정 등등. 슬픈 감정에도 여러 결이 있지 않나. 너무 행복해서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 슬프기도 하고 그런 것. 저 역시도 저를 정의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창동 감독님과 잘 맞았겠다.
- 감독님은 저를 감독으로서 대하지 않는다. 어른으로서 한 여자아이를 바라봐주신다. 배우들도 그렇다. 그 덕에 어려울 수도 있었던 것들이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저를 배려하는 거란 걸 안다. 거기에서 느끼는 고마움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계속 갚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데뷔작으로 칸에 다녀왔다.
- 다들 칸에 가게 돼 좋지 않냐고 하는데 저는 거기가 제 자리가 아니란 걸 안다. 너무 멀리 있는 이야기고 나는 따라가는 거다. 물론 작품 끝나고 흩어져 있다가 다시 함께하는 기분이 들어서 행복하다. 아쉽기도 하고. 또 이런 걸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함도 있다.
그게 차기작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지겠다.
- ‘버닝’이, 이창동 감독님이라서가 아니다. 이창동이라는 어른 혹은 이 배우들을 어디에서 만났더라도 저는 영향을 받았을 거다. 제가 느낀 건 어떤 게 올바름에 가까운 것인지다. 어떠한 자세, 어떻게 영화를 바라보느냐, 어떻게 연기를 대하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건지 인간적인 것에 대해 정립이 됐다.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 거고 제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거다.
뜨거운 데뷔였다. 작품으로도 외적으로도 관심이 뜨거웠다.
- 좋은 말이든 좋지 않은 말이든. 또한 좋은 시선이든 아니든 그게 정말 나를 향한 걸까 싶다. 우리 영화로 빗댄다면 분노를 표출할 곳이 필요한 거다. 분노를, 사랑을, 감정을 표현할 대상이. 제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다. 현실이 가짜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온다. 쏟아지는 관심의 정도는 모르겠다. 저는 (관심을) 그대로 수용하지도 못한다. 그게(관심이) 제가 연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니다. 욕심을 내거나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제가 이상해질 거 같다. 갈피를 못 잡을 것 같고. 저는 어떤 문제, 싸움이 있더라도 시간을 가지고 본다. 문제를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된다. 크게 보면 뜨거울 수밖에 없다.
마냥 시간을 두고 지켜볼 수 없는 일들도 있지 않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율해야 하는 일들도 생길 텐데.
- 저라는 애가 백지상태라면 이제 선 하나 그린 거다. 종이 하나가 펼쳐진 거다. 어떤 그림을 그릴 건지는 앞으로의 행보가 말해줄 거라고 본다. 그것들이 레이어드(Layered)가 되고 아카이브(Archive)가 되었을 때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거다. 지금 당장 어떤 모습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있으니 저의 이만큼이 전부라고 판단되는 것 같다. 여유를 챙기는 거다. 먼 곳을 넓은 곳을 깊게 보려고 하고. ‘조율’해야 하는 게 어떤 건지 저도 안다. 균형을 찾아가야 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당장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유연성이 생기려면 경험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서툴면 서툰 대로, 매너를 지키되 항상 웃고 있는 바비 인형처럼 존재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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