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4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한국과 포르투갈의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앞서 폴란드, 미국과의 두 경기를 1승1무로 마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최초 16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포르투갈 선수가 2명이나 퇴장당하는 등 경기가 거칠게 진행되면서, 좀처럼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공방이 계속되던 후반 70분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이영표가 차 올린 공이 피치를 가로질러 박지성에게 가닿았다. 박지성은 가슴팍으로 공을 받은 뒤, 오른발로 한 번 더 살짝 띄워 수비수를 따돌렸다. 찰나의 노마크 찬스. 박지성이 왼발로 때린 공이 그대로 골대로 빨려들어갔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는 관중들을 뒤로하고, 박지성은 검지를 펴서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일명 '쉿' 세리머니는 보통 원정팀 선수가 자주 보여주는 동작이다. 개최국 선수로서는 이례적이다. 어쩌면 개막 전까지 대표팀에 쏟아지던 우려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을까. 훗날 박지성은 자서전을 통해 해외축구 경기에서 본 유명 선수들의 세리머니를 그대로 따라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지만 말이다.
이후 세 번의 월드컵이 지나갔다. 2002년의 신화가 재현되는 일은 없었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16년 만에 무승을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손흥민은 눈물을 흘리며 운동장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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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졸전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예 축구에 등을 돌렸다.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도 무관심은 변함없었다. 평가전에서의 부진, 주축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은 설상가상이 됐다. 지난달 실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할 것이라고 응답한 이는 37%에 불과했다.
대표팀은 오는 18일(한국시간) 스웨덴과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24일 멕시코, 27일 독일과 일전을 갖는다. 세 팀 모두 우리보다 강하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러시아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겠다"던 손흥민의 다짐은 이뤄질 수 있을까.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뻔하디 뻔한 말이지만 그래도 공은 둥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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