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원이 거대 통신업체인 AT&T와 복합미디어 그룹 타임워너의 합병을 승인했다. 콘텐츠 제작부터 유통까지 아우르는 미디어 공룡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미국 미디어 산업의 재편이 가속될 것으로 보인다.
◆ 법원, 트럼프 대신 CNN 손 들어줘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의 보도에 따르면 12일(현지시간) 리처드 리언 미국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 판사는 AT&T의 타임워너 합병을 막아달라는 미국 법무부의 요구를 기각했다.
AT&T는 2016년 10월 CNN의 모기업인 타임워너를 약 854억 달러(약 92조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미 법무부는 양사가 합병할 경우 소비자의 통신요금이 높아지고 시장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면서 법원에 합병의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특히 이번 소송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CNN의 대리전으로 불리는 등 정치적 성격이 강해 법원의 판결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2016년 대선운동 당시 CNN과 전쟁을 방불케하는 갈등을 이어가던 트럼프 대통령은 AT&T와 타임워너의 합병이 "과도한 힘의 집중"을 야기한다면서 합병을 막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법무부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사업 내용이 직접 충돌하지 않는 기업들의 합병을 독점금지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법무부가 소송을 제기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이번 합병은 미국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비자들의) 비용이 오를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법무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소송 7개월 만에 미 법원은 조건 없이 이번 합병을 승인했다. 판사는 법무부의 주장이 “부적절한 생각”에 착안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기업 합병의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하면서 AT&T와 타임워너는 20개월 만에 합의를 이행할 수 있게 됐다. AT&T는 합병 계약의 만료일인 6월 21일 이전까지 합병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트럼프 행정부에 한 방을 먹인 것이라고 외신들은 풀이했다. 법무부는 법원의 결정을 두고 “이번 합병은 시장의 경쟁을 저해한다"고 반발하면서 ”향후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12일 시간외 거래에서 AT&T의 주가는 2% 하락했고, 타임워너의 주가는 4% 뛰었다.
◆ 미디어 업계 지형 변화 예고
AT&T와 타임워너의 합병으로 몸값 286억 달러의 새로운 미디어 공룡의 탄생이 임박했다. 타임워너 산하에는 미국 뉴스채널인 CNN과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케이블 방송사 HBO, 배트맨과 해리포터 등을 보유한 워너브라더스 등이 있다.
소비자들의 영상 콘텐츠 소비가 휴대폰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미국 2대 이동통신사 AT&T는 타임워너를 지붕 아래 둠으로써 넷플릭스와 같은 미디어 시장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이번 거래로 기업들의 ‘수직통합’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수직통합이란 하나의 기업이 공급부터 유통까지 모든 경영활동의 단계를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온라인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이 유기농 식품 판매업체인 홀푸드를 인수한 것이나 미국 드럭스토어 업체인 CVS가 건강보험회사 애트나를 인수한 것이 그 예다.
특히 미디어 기업들이 합종연횡을 가속하면서 미디어 산업의 지형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당장 WSJ 등 외신들은 미국 최대의 케이블 방송 배급사인 컴캐스트가 월트디즈니를 제치고 21세기폭스를 인수할지 주목하고 있다. 법원의 판결로 컴캐스트가 21세기폭스 주주들에게 규제당국의 심사를 통과하려면 월트디즈니 대신 자사와 합병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존 후둘리크 UBS 애널리스트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이번 판결은 컴캐스트의 21세기폭스 인수 추진을 포함해 다른 잠재적 인수합병에 청신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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