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에 있는 카지노호텔 약 40개 중 절반은 그의 소유다. 중화권 대표 부호인 그의 수식어는 ‘카지노 황제’, ‘도박의 왕’이다. “마카오에서 쓰는 돈은 다 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카오 카지노 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카지노 운영업체 SJM홀딩스 스탠리 호(허홍선∙何鸿燊) 회장의 이야기다.
호 회장은 최근 96세의 나이로 경영자의 길을 마감했다. SJM홀딩스는 12일 홍콩증권거래소에 공시를 제출해 “스탠리 호 회장이 이날 열린 연례주주총회를 끝으로 회장직을 내놓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고 중국신문망의 경제 매체인 중신징웨이(中新經緯)가 13일 보도했다.
호 회장은 명예회장직은 보유하고 그의 5번째 딸이자 현재 SJM의 이사 데이지 호가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SJM홀딩스는 "호 회장은 마카오 카지노 산업의 창시자이자 마카오 경제를 이끄는 이 시대의 가장 선구적인 위대한 사업가”라고 평가했다.
호 회장이 이끌고 있는 SJM홀딩스의 모기업인 STDM은 카지노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경마, 금융, 관광부터 마카오 국제공항의 지분 33%와 에어마카오의 지분 14%도 보유하고 있다. 컨테이너 항구의 지분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카오 곳곳에 호 회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 셈이다.
중신징웨이는 그의 이 같은 성공 뒤에는 파란만장했던 삶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호 회장은 “성공하는 데 있어 운은 5%밖에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 25일 홍콩의 명문가인 호텅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스탠리 호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3세 때 아버지가 주식 폭락으로 파산하면서부터 어두운 시기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베트남으로 도망갔으며 두 명의 형은 자살했다.
스탠리 호는 맨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일으켜야만 했다. 당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라고 생각해 최선을 다해 학업에 몰두했다. 그 결과 명문대인 ‘홍콩 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고 입학 후에도 장학금을 받는 등 ‘우등생’ 신분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학을 온전히 마칠 수는 없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마카오로 이주한 스탠리 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계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성실한 업무 태도와 탁월한 외국어 능력으로 회사 사장에게 인정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2세의 어린 나이에 임원자리에 오르며 기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중국과 마카오간 사치품 교역으로 큰돈을 번 스탠리 호는 1943년 그동안 모은 돈으로 홍콩에 건설회사를 차렸다. 마침 당시 홍콩이 경제자유무역지대가 되면서 홍콩 전체에 부동산 붐이 일어났고 엄청난 부를 쌓게 됐다.
이 부를 바탕으로 홍콩의 '붉은 자본가' 훠잉둥(藿英東) 등과 합작해 1961년 마카오 카지노 독점운영권을 따낸 그는 1970년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카지노 호텔 리스보아를 개장했다. 이때부터 40년 이상을 마카오의 '카지노 황제'로 군림하며 막강한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마카오의 한 공무원은 "스탠리 호가 정부에 낸 세금은 정부 세수의 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그가 없었다면 정부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당시 호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호의 이름을 딴 ‘닥터 스탠리 호 애비뉴’라는 도로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최근 몇 년 동안은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공개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지난 2009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9년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중화권 다수 매체들은 호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로 함에 따라 중화권 경제계에 2세경영 바람이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