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세 소년의 생일축하곡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이 날짜를 제안한 건 트럼프였을까, 김정은이었을까. 물론 누가 그 날을 제안한 것이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1988년부터 13년간 김정일의 전속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오전 11시30분에 김정일이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까만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소년 하나가 입가에 쑥스런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소년 옆에는 남매인 김정철, 김여정이 있었고, 뒤에는 부인 고영희(김정은의 어머니)와 김옥(김정일의 또다른 부인)이 함께 들어왔다. 꽃다발을 받아든 소년은 인사를 꾸벅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회장의 테이블 위에는 메뉴판과 함께 노래 가사가 적힌 인쇄물이 있었다. ‘발걸음’이란 제목의 노래였다. 파티가 시작되자 보천보전자악단의 연주가 시작됐다. 쉽고 경쾌한 리듬이라 참석자들은 모두 악보를 보며 따라불렀다. 후지모토는 이 노래 가사를 기억했다.
“척척 척척척 발걸음 우리 작은대장 발걸음 2월의 정기 뿌리며 앞으로 척척척 발걸음 발걸음 힘차게 구르면 온나라 강산이 반기며 척척척 온나라 인민이 따라서 척척척 찬란한 미래를 앞당겨 척척척”
# 소년 김정은을 위한 곡 '발걸음'
이날 처음 공개한 이 노래는 김정은을 위한 곡이었다고 한다. 작은대장은 9살 김정은을 가리켰다. 2월의 정기는, 1942년 2월16일 태어난 김정일을 찬양하는 표현이었다. 왜 하필 아홉 살 때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에게 ‘후계자’를 암시하는 이런 노래를 지어줬을까. 후지모토의 설명은 놀랍다.
김정일은 바카라(카드 석장으로 합계 숫자의 끝자리수 크기를 가리는 게임) 트럼프광(狂)이었다. 9는 바카라에서 가장 유리한 숫자이며 그에게 행운을 암시하는 숫자였다는 것이다. 네째 아내인 고영희 소산에다 두 번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은근히 걸었던 기대를 의미한다고 그는 힘줘 말했다.
김정일의 생일이 2월16인 것도 그 자신에겐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전용차 번호판이 216으로 시작하는 것, 2165555의 전체 숫자를 합치면 9가 되는 것도 그런 믿음의 소산이라고 후지모토는 말해준다. 김정은의 생일 1월8일 또한 합치면 9인 것도, 적어도 김정일만은 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 6.12는 김정일 생일을 거꾸로 한 숫자
6월12일은 김정은은 아버지 생일을 거꾸로 한 숫자이며. 합치면 9가 되는 숫자이다. 북한이 이 날짜를 제안했다면, 김정은이 이 회담에 대해 명운을 걸고 큰 ‘베팅’을 다짐한 마음의 흔적일 수도 있으리라.
2000년 김정은은 원산초대소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후지모토와 5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다. 17살 소년이 불쑥 물었다. “나는 제트스키나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승마를 하는데 인민들은 뭘하고 있나요?” 대답이 궁해서 망설이자 이번엔 “외국 백화점이나 상점엔 물자나 식량이 넘쳐나던데 우리나라 상점엔 왜 물건이 없나요?”라고 다시 물었다. 그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김정은은 갑자기 열차 오락실칸으로 옮기자고 말했다. 거기서 웨이터에게 술을 시킨 뒤 “우리나라는 공업기술이 뒤떨어져 있어요. 자랑할 지하자원은 우라늄 밖에 없고...원산초대소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정전이 발생했고요.”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스위스 유학시절의 힘겨웠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유럽에서 북한의 실상에 대한 ‘각성’을 했을 그 소년이, 18년 뒤 북한의 지배자가 되어 대담하게도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트럼프 미국대통령을 만났다.
#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당했다?
12일 세계적인 기대와 관심을 모았던 북미정상회담의 합의문은 좀 싱거워 보였다. 많은 언론들은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 조치 약속’인 CVID가 합의문에 명시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했다. 합의문과 관련한 트럼프 기자회견은 또다른 논란을 불렀다. 한미연합훈련을 ‘도발적(provocative)'이라고 표현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뉘앙스로 ’북미 협의 중 중단‘을 언급한 것도 놀라웠고,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까지 시사한 것은 한미동맹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훼손한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어떤 외국언론은 ‘김정은의 승리’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화끈한 담판을 기대했던 여론의 속도와 강도(强度)에 못 미친 회담이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편집국 TV에 붙박이로 서서 허탈감을 느낀 나와 같은 심경의 이들이 많았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믿고 기대한 것이 누구였는가. 정치적 사업가라는 트럼프였는가, 얼마전까지 ‘참수작전’까지 흘러나오던 김정은이었는가. 북미회담이 겨냥하고 있는 진정한 목표가 지난 세기부터 축적되어온 냉전시대의 완전한 종지부라는 걸 상기한다면 최소 70년간 쌓여온 적대감과 불신을 조건없이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비상식적일지도 모른다.
# 실언이 남긴 매력
김정은은 지난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때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라는 조크를 유행시켰다. 문재인대통령을 위해 평양냉면을 멀리서 가져왔다고 말하려다가, 자신의 말을 머쓱하게 급히 수정하며 한 말이었다. 이 발언이 인상적이었던 까닭은, 남북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회담의 의욕에 반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담 상대에 대한 정성을 강조하는 뜻은 전달하면서, 부드럽게 자신이 원하는 남북의 긴밀감을 높인 셈이 됐다. 하지만 이 ‘자체 정정’이 지닌 함의는 사소하지만 다른데에 있었다. 북한의 절대권력이 ‘무(無)오류’의 완벽이 아니라 말실수도 할 수 있는 ‘인간’이구나.
이번 회담에서도 인상적인 말을 몇 가지 남겼다. 트럼프와 첫 악수를 나눈 뒤에 한 말은 그 중 하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 김정은 프레임 탈피를 공언한 것?
이 말에 대해서도 분분한 해석이 나왔다. 김정은의 일성(一聲)이 ‘김정일 프레임’의 탈피를 공언한 말이라는 풀이도 있었다. 발목을 잡는 과거와 그릇된 편견과 관행이 북한 체제의 경영에 대한 자아비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 언론인은 말귀를 못 알아들은 해석이라고 일갈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는, 북한 발목이 아니라 김정은과 트럼프의 발목이라는 것이다. 회담을 하는 양쪽을 가리켜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얘기다. 즉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온 상황과, 그것을 힘으로 제압하려고 압력을 증가시켜온 미국 쪽을 동시 비판하면서 서로가 그것을 떨치고 이 자리에 왔다는 논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대정상회담 시작 때 말한 “회의적인 시선과 이런 것들을 다 짓누르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앉은 것은 훌륭한 평화의 전주곡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발언에서의 ‘우리’를 감안해볼 때, 후자의 풀이가 논리적으로 들린다.
# 그래도 2분의 1의 반성은 있다
하지만 후자의 해석이라 해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북한 혹은 김정은이 들어있는 만큼 중인환시리의 공식석상에서 드러내기 어려운 ‘일정한 반성’을 대담하게 꺼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반성은, 아까 후지모토에게 말했던 17세 소년의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는 또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거대한 사업’을 해볼 결심이 서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공동합의서에 서명하면서는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가 회담 합의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의 협상 의지를 극구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핑크빛을 날리는 것은, 사업가로서 그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 나오는 제8원칙(신념을 위해 저항하며 싸워라)과 제10원칙(희망은 크게 비용은 적당히)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여 개운치 않다.
# CVID는 믿음없는 거래에서 받으려는 '말' 보증수표
하지만 트럼프 또한 그날 회담과 또다른 여러 경로로 뭔가 감을 잡은 게 아닐까. 김정은의 ‘딜(deal)' 가능성을 높게 본 나름의 이유을 찾았을 것이다. 첫 북미정상회담이 거둔 성과는, 김정은이 보낸 눈짓에 트럼프가 일단 베팅을 해준 것에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북한 내부에 엄청난 변화를 설득할 시간과 ’동기‘를 부여하는 단계 전략의 첫 단추였다는 얘기다. 실익이 없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트럼프가, 맹탕회담으로 농락당하며 계산없는 선심을 쓰는 것은 너무나 그답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CVID와 CVIG. 이 암호같은 말에 숨어있는 진짜 뉘앙스는 뭘까.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 그리고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 완전하고 확인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와 그런 (체제)보장. 동어반복같아 보이는 저 말들을 겹쳐놓은 까닭은, 핵폐기와 체제보장에 대한 상호 신뢰가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못 미덥기에 말로써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만들자는 의욕이 저 용어 속에 들어있다.
# 매직넘버9
회담을 하는 양쪽은, 저것을 내주는 순간 그것에 대한 완전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삐끗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거래’다.
지금 북한에겐 중국, 베트남과 같은 체제진영 국가들의 번영이 절실하며 핵무기 때문에 옥죄어온 경제제재를 더 견디기도 어렵다. 미국으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악의축’으로 찍혀온 북한의 핵도발 리스크를 완전히 해결하려는 의지 또한 상당하다. 그게 북미회담이다. 김정은이 한번 거절당한 회담을 다시 살려내기까지 하면서 트럼프 게임을 하고자 ‘매직넘버 9’의 승부수를 던지고 갔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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