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푸젠에서 연마된 시진핑의 양대 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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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6-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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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⑨

  • ‘부정부패 척결劍’과 ‘항일민족주의劍’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신화통신]


"인간은 환경에 의존하지 인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미생물이 그 배양액에서 자라듯 인간도 자연적 인문사회적 환경에서 자란다." <강효백>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된 싱가포르 국민의 77%가 중국계다. 그들 대다수는 푸젠(福建)성 출신 화교다.

광의의 화교는 화교(華僑)와 화인(華人), 화예(華裔)로 구분할 수 있다. 화교는 중국 국적의 해외 체류 중국인이며, 화인은 현지 국적을 취득했으나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중국인, 화예는 자신이 중국인의 후예임을 인식하나 중국계 커뮤니티에 참여하지 않는 중국혈통을 일컫는다.

동남아 화교 현황[자료=강효백 교수]


여기에서의 화교는 광의의 화교를 일컫는다. 현재 약 6000만명 화교 중 절반 가량이 3000만명의 본향이 중국 푸젠성이며, 약 1500만명이 광둥성이다. 푸젠 화교 출신이 제일 많은 까닭은 뭘까? 그건 바로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다.

14세기 푸젠성에서부터 백열화되기 시작한 왜구의 노략질에서부터 19세기 굴욕의 청일전쟁, 20세기 30만명이 죽임을 당한 난징대학살을 비롯해 2000만 중국인이 살상당한 중일전쟁을 겪은 중국에게 21세기 오늘까지 700년간 불공대천지 원수, 제1주적국은 일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적대국 관계인 중·일 관계는 '시진핑-아베' 시대로 들어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식민사관이나 친일잔재 청산 문제에서 자유로운 중국의 반일감정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폭과 깊이, 차원 자체가 다르다. 중국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서구열강의 침략은 용서할 수 있지만 섬나라 일본의 만행은 영원히 용서할 수 없다”고.

중국의 31개 성(省)급 광역행정구역에서도 반일감정이 가장 강한 성(省)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왜구의 약탈이 집중적으로 계속되었던 푸젠성이다(아래 지도참고).

[제공=강효백 교수]


이러한 푸젠성에서 시진핑은 17년을 당·정·군 고위지도자로 보냈다. 시진핑이 중국 역대 최고지도자 중 가장 강력하고 선명한 혐일주의자로 정평이 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 취임후 단 한번도 일본을 방문하지 않았다. 일본 측으로부터 공개적·비공개적 방일 초청을 수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대신 보냈다.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이던 2009년 12월 15일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은 바 있다.

1990년 5월 시진핑은 푸젠성의 성도(도청소재지 격) 푸저우시의 당서기(시장격)겸 시인대 상무위원회 주임(시의회 의장격) 겸 푸저우군 분구당제1서기(지역 군총사령관)등에 임명되어 푸저우 당정군 3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의 업무 원칙은 ‘즉각 처리한다’(馬上就辦)였다. 중국식 ‘만만디’ 태도를 뜯어고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 개혁·개방의 전초기지이자 대만의 맞은편 푸젠성에서 빛과 그림자를 모두 겪었다.

푸젠성의 동쪽바다 건너편은 대만이다. 냉전시대 대만해협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DMZ)처럼 동족 대립과 상생의 해협이었다. 푸젠성은 대만 해방을 위한 대륙의 최전방기지였다. 약 30여년간 간헐적인 포격전이 계속되었던 대만 해협은 개혁·개방이후 상쟁에서 상생으로 대전환을 이루기 시작했다. 시진핑은 평화와 발전이라는 세계적 조류를 그 바다의 DMZ에 밀어닥치게 했다.

시진핑은 당시 대만기업 특구인, 대만공업촌을 설립해 동남자동차 등 대만기업을 푸저우(福州)에 유치했다. 푸저우시 푸칭(福淸)현은 푸젠성 64개 현(縣) 중 빈곤 순위 58위였다. 그러나 푸칭 출신 대만 화교를 유치해 몇 년만에 경제력 2위로 끌어올렸다. 시진핑은 1992년 10월 중국 최초의 화교자본 투자구인 룽차오(融僑)경제기술개발구를 설립했다.

시진핑은 푸저우 서기로 6년 동안 근무했다. 마지막 1년은 푸저우 서기와 푸젠(福建)성 부서기 겸 푸젠성 미사일예비역사 제1정치위원을 겸했다. 시진핑은 푸젠성 부서기 4년째이던 1999년 8월 허궈창(賀國强) 푸젠성장이 충칭시 서기로 발탁되자 부성장 겸 성장대리로 임명되었다. 당시 시진핑 나이 46세로 최연소 성장급이었다. 라이벌은 당시 44세로 허난성장으로 부임하던 리커창 현 총리 뿐이었다.

“물고기와 곰발 모두 내가 원하는 것. 둘을 함께 얻을 수 없으면, 물고기를 포기하고 곰발을 취할 것이다. 삶도 의로움도 내가 원하는 것.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맹자>

시진핑이 푸젠성 대리성장으로 임명된 직후인 1999년 4월 위안화(遠華)사건이 폭발했다. 농민 출신 라이창싱(賴昌星) 위안화 그룹회장이 1991년부터 99년까지 자동차·담배·석유·전자·화학제품 등 밀수를 통해 15조원가량을 탈세한 초대형 부패사건이다. 공안·세관·해군 등 당·정·군 관계 고위 인사가 밀수를 묵인해 주고 거액의 이권을 챙겼다.

라이창싱은 룸살롱, 스파 등을 갖춘 특수 비밀 접대 7층 홍색 건물을 세우고, 당·정·군 고위인사와 결탁하는 등 거액의 로비를 벌여왔다. 이 사건이 터지자,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가 철저한 조사를 지시해 당 중앙은 특별수사팀을 파견해 반 년이상의 수사를 벌였다. 시진핑 대리성장을 포함 1000여 명이 조사 대상에 올랐다. 결국 베이징의 공안부 부부장(차관), 해군소장, 푸젠성과 샤먼, 푸저우시의 고위 간부 등 300여명이 처벌되고 1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라이창싱은 2011년 7월 12년간의 도피생활끝에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강제 송환된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위안화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푸젠성 고위간부들은 대부분 연루되었으나 오로지 시진핑 단 한 사람만이 청렴한 관리로 밝혀졌다. 당시 홍콩 대공보(大公報)는 “시진핑이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온갖 유혹에 견딜 수 있었다”고 크게 보도했다.

푸젠성을 거친 고관들은 대부분 끝이 안 좋았다. ‘돈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시진핑에게도 유혹은 있었지만 그는 ‘악마의 손길’을 뿌리쳤다. 시진핑은 “곰발(권력)과 생선(재력)은 함께 얻을 수 없다” 정치인이 돈을 탐하면 탐관오리가 되고 결국 망한다는 강철 소신을 실천했기 때문에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3월 헌법을 개정하여 1인 통치와 1당 독재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비결은 부정부패 척결과 항일민족주의를 내걸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 반만년 중국 역사상 어느 황제나 주석도 하지 못한 두 가지 큰 일을 감행하는 영도자에게 중국인들은 열렬한 호응을 보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시진핑의 권력 운용과 인기비결의 양대 보검 , 즉 ‘부정부패 척결劍’과 ‘항일민족주의劍’은 푸젠성에 연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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