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자유한국당을 위한 헤게모니적 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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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06-2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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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자유한국당이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론과 수습방안을 놓고 내홍 중이다. 밑바닥엔 계파 간 당권경쟁도 깔려있어서인지 파열음이 크다. ‘보수정당의 패배’를 ‘보수의 패배’와 동일시할 건 아니다. 그럼에도 보혁(保革)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평평하게 하려면 의석 수(數)라도 비슷한 야당이 하나 쯤 건재해야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옳은 처방은 정확한 진단으로부터 나온다. 때로는 적(敵)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해볼 필요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은 일관된 전략 전술의 결과처럼 보인다. 좁게는 정권을 되찾기 위해서, 넓게는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그들은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이념적으로 우위에 서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전쟁 대신 평화를 들고 나왔고, 자본주의, 자유주의의 차가운 실적주의(meritocracy)를 따뜻한 ‘사람’으로 대체했다. 기계적 기회균등 속에 숨어있는 불평등을 찾아내 ‘갑질’로 재(再)정의했다. 이런 일들을 실행할 우군(友軍)을 사회 곳곳에 심었다. 보수는 포위됐으나 자신들이 포위된 줄을 몰랐다.

진보의 부활은 두 차례의 각성에서 비롯됐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첫 번째 각성은 1980년대 말 불어 닥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념 간 대결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저서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1992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최종적 정부형태(a final form of human government)”라고 선언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진보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약(藥)이 됐다. 소중한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는 방심(放心)의 유혹에 넘어갔다. 이념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으니 더는 좌파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보 앞엔 으레 ‘낡은’이란 형용사를 붙였다. ‘낡은 이념에 매몰된 시대착오적 무리’ 쯤으로 무시했다. 1990년대 초반 수십만명의 아사자가 나오면서 떠오른 ‘북한 붕괴론’도 방심을 키웠다. 노무현 정권이 ‘폐족’임을 자인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이명박·박근혜표 보수가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진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두 번째 각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보수는 느긋하고 행복하고 무능했다.

그 결과는 다들 아는 바와 같다. 진보는 더 유연하고 단단해졌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한 세대 넘게 지속해온 ‘운동’의 효과는 언론, 교육, 종교, 문화 전 영역에서 내응(內應)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궤적을 보면서 이탈리아 혁명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를 떠올리게 되는 건 자연스럽다. 우리 사회의 진보가 그람시의 헤게모니(hegemony)이론이나 진지전(陣地戰·war of position) 개념을 실제로 사회변혁의 한 방법으로 보고 실천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람시의 보편성에 비추어 유추할 뿐이다.

대표적 보수논객인 조갑제는 2010년 10월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에 ‘그람시, 한국서 대성공’이란 글을 올렸다. 자신이 1998년 12월호 월간조선에 썼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인데 머리글에서 “12년이 지나 읽어보니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이 그동안 한국사회를 바꾸는데 성공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8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이런 인식은 확신으로 굳어졌을 법하다. 그람시는 한 사회의 지배계급이 물리적 강제력만으로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건 아니라고 봤다.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同意)를 통해서 지배하게 되는데 그 동의는 지배계급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피지배계급이 받아들임으로써 얻어진다. 그런 동의를 가능케 하는 힘(리더십)이 헤게모니다. 이를 무력화하려면 대항(對抗)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사회 곳곳에 진지를 구축해 이념투쟁을 해야 하는데, 한국사회가 꼭 그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진지전’은 한 예일 터.

1980년대 초 그람시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인간의 의지가 중요시되는 과정으로서의 그의 혁명론은 주목을 받았다. 가치중립적으로 보자면 지금도 사회변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중요한 연구 주제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초상집 같은 자유한국당에 그람시를 들이대느냐고? 진보의 그 치열함에서 뭔가를 느꼈으면 해서다. 보수 우파의 헤게모니는 어디로 갔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난 19일 한 세미나에서 자유한국당이 지은 죄를 7가지로 요약했다.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계파이익 챙기느라 국민 전체 이익을 돌보지 못한 죄,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죄,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한 죄 등이 그것인데 구구절절 옳은 지적이다.

세려고 치면 70가지도 넘을 ‘죄목’을 가슴에 아프게 새기면서 지난 30년을 그람시의 헤게모니적 관점에서라도 찬찬히 톺아봤으면 한다. 어떤 힘이 이 시대를 관통했으며, 그 끝자락에서 자유한국당은 대체 뭘 붙들고 있는지, 늦었지만 수면 아래 도도한 변혁의 힘을 직시할 때는 아닌지 자문(自問)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박, 반박 타령이라면 보수의 미래는 없다. 결국은 다 죽어서 사는 수밖에. 우리사회에서 보수가 지은 원죄(原罪)가 이리도 무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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