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노태우와 저녁 먹으며, 직선제 검토해보라 했어"
오늘은 31년 전 노태우씨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6·29선언을 한 날이다. 이 선언이 발표된 해는, 최근 영화로 나온 '1987'의 바로 그해이며, 선언이 나온 배경 또한 영화에서 다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에 따른 국민 저항이 직접적 원인이 됐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씨가 고민 끝에 결단한 형식을 취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파격적으로 수용한 것처럼 '스토리'를 만들었지만, 사실은 전씨가 기획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실은 2주일 전에 노 대표와 저녁을 함께 할 때 내(전두환)가 직선제를 검토해 보라고 했더니 노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했어.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김성익의 '전두환 육성증언' 조선일보사. 1992.
당시 고명승 보안사령관의 증언도 있다.
"그해(1987년) 4월 보안사 핵심부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1년 뒤 중간평가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또 정치인을 사면 복권할 경우 특정인을 배제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김재홍의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군부와 권력' 중)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파문이 100만 시위 불러
왜 군사독재 정권이, 당사자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민주화선언'을 했을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다급한 사정이 있었다.
그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4·13호헌 조치(당시 진행되던 직선제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기존 헌법을 유지한다고 선언한 것으로 전두환정부가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조치)에 대한 민심의 반발이 커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밝힌다.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의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박종철 추모미사에서)
이에 대한 규탄대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6월 26일에는 37개 도시에서 100만명이 시위를 벌인다. 구호는 호헌철폐와 박종철 진상규명이었다. 경찰력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자, 전두환 정부는 군부대를 투입하는 위수령을 검토했다.
# 전두환 위수령 검토에, 미 차관보 방문해 저지 압력
이때 미국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1987년 7월 2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한국을 방문한 개스틴 시거 미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워싱턴의 메시지를 가져왔을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폭력사태를 개탄하고 군사행동을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한다.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6·29선언을 한 그날, "한국의 여당이, 미국의 군사전략 계획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는, 국내 정치상황 악화에 대한 미국의 심각한 우려에 따라 이번 조치를 취했다"고 일본 전문가의 말을 빌려 논평하고 있다.
전두환씨는 다음 해에 치러질 88올림픽의 개최국으로서 국제적 이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씨에 비해 머리회전이 빨랐던 전씨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자는 의견을 냈을 때 노씨는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때 전씨는 연금 중인 김대중씨가 해금되어 대선에 출마한다 해도 야당이 2개나 3개로 쪼개진 상태로 대결하게 하면 필승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설명해줬을 것이다. 6월 10일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씨는 전씨의 각본에 찬성해, 고심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대결단을 내린 연기(?)를 했다.
# 노태우 띄우기와 야당 분열 작전 성공
선언문은 8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핵심은 직선제 개헌과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그리고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이었다. 지방자치의 실시가 공식 발표된 것도 이 문서였다. 군사독재 정권이 국민저항과 겹친 난제를 풀어야 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일종의 '항복선언'이었으며, 집권세력으로서는 정권 재창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선언 이후 직선제로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계기가 마련되고 민주국가의 기본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 이전까지 집권당에서 내놓은 공개적 민주화 선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전두환씨가 그렸던 선거구도는 거의 정확하게 실현됐다. 그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이른바 3김이 야당 후보로 총출동했고, 이에 맞서 여당 후보 노태우씨가 36.6%라는 비교적 낮은 지지율로도 당선될 수 있었다.
6·29선언은, 민주화의 어마어마한 열기와 미국 입김, 그리고 올림픽이 기묘한 형식으로 작용하여 전두환씨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그 단초에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사상 초유의 고문살인 진상 조작으로 1987년을 뒤흔들었던 '박종철사건'이 있었다.
# 박종철을 추모한 정호승 시와 김광석 노래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정호승의 '부치지 않은 편지'/노래 김광석/박종철 추모시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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