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밖에 모르는 세대, 이들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3월 '푸틴(Puteens)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내놓은 진단이다. 3월 18일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 10대들을 인터뷰했는데, 푸틴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확인했다는 게 기사의 골자다. 이 덕분이었을까. 푸틴은 무려 76.6%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다.
푸틴은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후 사실상 줄곧 집권했다. 그가 집권한 18년 동안 러시아에서 태어난 2800만명에게 최고 권력자는 푸틴이 유일하다. 푸틴밖에 모르는 러시아 10대(teens)가 '푸틴(Puteens)'이 된 이유다.
◆현대판 '차르' 등극 노리는 푸틴··· 10대들 '좋아요'
푸틴 대통령은 3월 대선 승리로 2024년까지 임기 6년을 보장받았다. 그가 2024년 퇴임을 예고했지만, 곧이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틴이 3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우회해 정권 연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무성하다. 그는 2008년에도 대통령 연임 제한을 피해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내주고 총리로 물러났다. 2012년 대선에서 권좌를 되찾기까지 실권을 놓은 적이 없다. 푸틴의 2030년 대선 복귀설이 나오는 이유다.
푸틴이 2030년에 다시 집권하면 이오시프 스탈린 옛 소련(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을 제치고 러시아 현대사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울 수 있다. 현대판 '차르'(제정 러시아 시대 황제)가 되는 셈이다.
10대들의 강력한 지지가 푸틴의 차르 등극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러시아의 선거연령은 18세. 2030년이면 지금의 푸틴 세대 대부분이 표를 던질 수 있다.
10대들이 푸틴을 지지하는 건 그가 유례없는 번영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사회의 제재로 혹독한 경기침체를 겪었지만, 러시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99년 말 이후 6배 넘게 늘었다. 실업률은 5월 현재 4.7%.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평균치(8.5%)보다 훨씬 낮다. 특히 러시아는 서방세계보다 한참 낮은 청년실업률을 자랑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신 통계를 근거로 18~24세 러시아인이 부모를 비롯한 과거 어떤 세대보다 더 푸틴을 지지하고, 러시아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러시아가 서방이나 과거 소련보다 우월한 체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 메드베데프 총리의 부정축재 의혹에 반발해 일어난 시위에 젊은이들이 대거 나서기도 했지만, 푸틴에 대한 지지는 확고부동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러시아 정치전문가인 글렙 파블로프스키와 이반 크라스테프는 최근 유럽외교관계위원회(ECFR)에 기고한 글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심각한 집회는 없었다"며 "서방의 환상과 달리 25세 이하 러시아인은 이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친푸틴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강한 러시아' 드라이브··· 크림 병합 ‘서방정책’ 종지부
올해 65세인 푸틴은 소비에트 시절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으로 '강한 러시아'를 지향한다. 그가 집권할 때 러시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방정책이 몰고 온 소비에트 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에 유입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설익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정불안 속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사임하면서 권좌에 앉은 푸틴은 옛 권위주의를 되살려 질서를 잡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푸틴이 반대파를 누르고 러시아를 장악한 건 그가 주요 방송과 정보기관, 사법부 등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또 러시아인 대부분이 푸틴을 지지한 건 반대파도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푸틴의 권위주의는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혼란에 노출된 러시아인들의 과거회귀 본능을 자극했다. 특히 '강한 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스트롱맨(strong man)' 푸틴에 대한 지지의 밑거름이 됐다.
강력한 지지기반을 갖게 된 푸틴의 '강한 러시아' 전략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이라는 실력행사로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는 당시 접경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연습을 벌이며 우크라이나를 위협했다. 국제사회는 이에 반발해 강도 높은 제재를 취했고, 러시아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고 있는 한 서방, 특히 유럽연합(EU)과의 관계 개선은 요원해 보인다.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 크림반도 병합이라는 무리수를 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구(舊)체제에 대한 향수를 꼽는다. 그는 2005년 러시아 전역에 생중계된 의회 연설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한탄한 바 있다.
주목할 건 푸틴의 크림반도 병합이 어쩌면 표트르 대제 이후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가 추진한 서방정책의 종언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1999~2011년 푸틴의 보좌관을 지낸 블라디슬라브 스르코프는 지난 4월에 낸 논문에서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2014년을 기점으로 "서쪽을 향한 러시아의 기나긴 여정은 끝났다"고 단언했다.
스르코프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등 일방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서방과의 관계가 냉전 이후 가장 냉랭해졌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지정학적 고립이라는 새 시대에 진입했다고 결론지었다.
◆‘차르’ 등극 길목엔 푸틴 세대·한반도··· ‘신동방정책’ 촉각
푸틴이 2030년 이후를 내다보려면 지금의 '푸틴 세대'를 붙잡아둬야 하는데,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 소식통은 가디언에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궁)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관건은 ‘강한 러시아’의 자존심과 경제적 번영을 유지하는 일이다.
스르코프의 진단은 푸틴이 왜 소비에트 시대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동쪽을 눈여겨보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푸틴은 과거 소련 멤버 중심으로 이룬 경제연합체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을 통해 소비에트의 부활을 꿈꾼다. 동시에 동방경제포럼(EEF)을 앞세워 신동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강한 러시아’ 전략으로 서방과 당당하게 맞서면서 경제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틈새는 동쪽밖에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에서 한반도는 피해 갈 수 없는 길목이다. 한국이 중재한 북·미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소외감을 넘어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에 따라 푸틴 대통령은 서둘러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만날 계획이다. 푸틴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직접 중국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공을 시 주석에게 돌릴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중국에 대한 푸틴 대통령의 행보와 발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함께 배제된 중국과 손잡고 미국의 독주를 막으려는 구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신속한 비핵화 이행 요구에 맞서 북한이 추구해온 단계적 비핵화를 지지해왔다.
전문가들은 북한과 러시아가 오랫동안 쌓아온 밀접한 관계를 감안하면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러시아의 영향력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미국 외교협회의 아시아 연구 책임자인 엘리자베스 이코노미는 최근 쓴 글에서 "러시아가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논의를 진전시키거나 망칠 수 있는 러시아의 숨은 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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