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그날]노벨평화상 중국 류샤오보의 죽음, 4가지 '치명적인 진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입력 2018-07-13 11:2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지난해(2017년) 7월13일 오후 9시경. 중국의 인권운동가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劉曉波, 향년61세)가 눈감았다. 새벽 물결(효파,曉波)이라는 그 이름처럼, 중국의 민주화를 외쳐온 류샤오보는 사후에도 여전히 이 대륙에선 불편한 존재이다.

그는 이웃나라의 한 지식인일 뿐일 수도 있지만, 체제 질서의 모순에 반기를 든 용기있는 양심으로, 인간 보편의 거울이 되어 개인개인의 일상을 깨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치열하게 살다 죽어간 그를, 오늘 하루쯤은 돌이켜 떠올려 보는 것이 '빛나는 영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 모른다. 류샤오보에 대해 지금 마음에 메모해두면 좋을 4가지를 정리해본다.
 

[13일 타계 1주기를 맞은 중국 인권운동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 그의 노벨평화상에 중국이 분노했다?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은, 2010년 그가 수감생활을 할 때였다. 1989년 6·4항쟁(천안문사태라고 부른다) 때, 문학박사이자 교수였던 그는 하와이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돌아와 천안문광장에서 단식투쟁을 벌인다. 당시 그는 '천안문 4군자'로 불렸다. 이때부터 시작한 류샤오보의 민주화투쟁은 4차례의 투옥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옥살이는, 2008년 중국민주화 요구시위인 '08헌장 사건'을 주도한 뒤의 일이었다. 08헌장에는 중국 지식인들이 대거 참가했기에 당국이 류샤오보의 존재를 상당히 위험하게 여기는 계기가 됐다.

2010년 노벨평화상은 중국으로서는 충격이었다. 중국정부는 자신의 우방국들(러시아, 파키스탄, 베트남, 이집트, 쿠바, 수단, 모로코, 베네수엘라)과 어깨를 겯고 노벨상 선정위원회에 항의했다. 그해 12월 10일,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가족, 친척, 중국내 인권운동가들의 출국이 금지된 상태에서, 노벨평화상 메달은 빈 의자에 놓여졌다. 시상식장에선 사람 없이 놓여진 메달을 향해 3분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당시 노벨상 위원회 토르비요른 자글란드 의장의 연설은 명문으로 기억할 만하다. "아이작 뉴턴은 생전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 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좇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노르웨이는 2010년 중국에 연어 1만1000t을 팔아 중국 연어 소비량의 92%를 차지했다. 3년 뒤 연어수출은 반토막이 났다. 노르웨이 연어 대신 영국 연어 수출이 확 뛰었고 2010년에는 아예 수출실적조차 없던 파로제도의 연어가 어마어마하게 팔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류샤오보 노벨평화상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중국 주도의 AIIB 가입을 계기로 숨통을 틔워주긴 했지만 노르웨이로서는 혼쭐이 났다. 류샤오보 타계 때 노르웨이의 논평이 미지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런 눈치보기였을 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 류샤오보는 왜 중국정부에 철저히 미운 털이 박혔나

1955년 지린성 창춘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중학생으로 내몽골로 ‘하방’되어 거친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마오쩌둥 사망 후 대학이 문을 열었고 그는 지린대 중문과, 베이징 사법대 대학원에서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스위스와 미국에서 중국문화를 강의했다. 1989년 34세 때 천안문 사태를 맞았고, 일신이 안전한 하와이에서 굳이 몸을 돌려 중국으로 돌아와 시위에 참여한 것은 그 자신에게도 ‘인생혁명’이었다.

1987년 한국에선 6월항쟁이 있었고 소련에선 고르바초프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젊은 그에게 조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일깨웠을 것이다. 천안문의 학생과 지식인들은 평화시위를 표방했다. 그들은 진압군이 들고 있던 총을 빼앗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예민하게 대응했다. 그들은 20년 전 문화대혁명 때의 천안문 홍위병 시위 악몽을 떠올렸다. 당시 홍위병들의 폭력을 겪었던 이들이 공산당 지도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천안문의 항의를 피로 물들이며 제압한다. 덩샤오핑은 “홍위병 난동의 재연을 묵과할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했던 덩샤오핑은 이 사태가 분위기를 경직시킬까 우려했다. 시위 진압 이후 처벌을 강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주동자급도 10년 이하를 선고했으며 망명을 희망하면 해외로 보내줬다. 투옥됐다 나온 류샤오보는 국내에 남아 천안문사태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집필활동을 펼쳤다. 1995년 그는 다시 체포되어 6개월형을 받는다. 1996년 류샤와 결혼한 직후, 다시 체포된다. 중국 변방에서 3년간 노동을 하는 형을 받는다.

당국이 류샤오보를 경계했던 것은 ‘집단시위’보다도 끈질긴 ‘일상시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생각을 바꿔놓는 무서운 유형의 ‘작은 혁명가’였다. 2008년의 08헌장은 그의 의식혁명이 대규모 지식층과의 연대를 이끌어낸 상징적 사건이었기에, 중국 당국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는 국가전복 혐의로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랴오닝성 진저우시 교도소에 수감됐다. 투옥 2년 만에 노벨평화상이 주어진 것은, 중국의 민주화 탄압에 대한 국제적 항의와 경고가 숨어있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류샤오보의 유골단지가 2017년 7월 15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 앞바다 물 속으로 내려지는 모습을 아내 류샤가 지켜보고 있다.]



# 그를 살릴 수 있었다? 누가 류샤오보를 죽였나

류샤오보가 타계했을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베리트 라이스 안데르센 대표는 “중국 정부가 그의 조기 사망에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기 병에 이르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로 옮겨지지 않았던 것이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타계 당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사법국은 인터넷 홈페이지 공지글을 통해 “가석방 되어 교도소 밖 병원에서 간암치료를 받아온 류샤오보가 사흘 전(10일)부터 중태에 빠졌고 13일 오후 다발성 장기기능 상실로 숨졌다”고 밝힌다. 수감생활을 하던 그는 그해 5월에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투옥 전 그는 B형간염 환자였다) 가석방되었다. 중국 정부는 그를 중국의대 제1병원에 입원시켜 현지 최고의 전문의들의 치료를 받게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사자인 류샤오보는 독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다.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내 류샤를 가택연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배려도 있었다고 한다.

해외에서도 류샤오보의 출국 요청이 빗발쳤는데, 중국 당국은 내정간섭이라며 해외치료를 거부했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양젠리(천안문 사태 때 시위했던 운동가)가 트위터를 통해 류샤오보의 병세 위독을 증언한다. 배에 복수가 차고 투약도 힘들 만큼 악화되었으며 호흡곤란까지 겪고 있다고 말했다. 7월 8일 중국 정부는 미국의 조셉 M 허먼과 독일 마르쿠스 W 뷔흘러 등 의사를 국내로 초빙해 진찰토록 했다. 진찰을 받고난 소견에 대한 중국의 발표와 두 의사의 발표가 내용이 달랐다. 중국은 ‘해외 이송 치료가 어렵다“고 말했다고 전했고, 당사자들은 ”류샤오보의 이송이 가능하다“고 공동회견을 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154명이 류샤오보와 류샤 부부를 미국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중국 정부에 서신을 보냈고, 유럽연합은 류샤오보의 이동제한 철회를 촉구했으나, 중국의 반응은 없었다. 별세 직전 그는 부인 류샤에게 말했다. ”부디 잘 사시게(好好活下去).“사흘 뒤 유해는 화장되어 보하이 만에 뿌려졌다. 가족들은 묘지를 원했지만, 반체제 인사들의 성지로 변할 것을 우려한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류샤오보의 죽음에 대한 국제사회의 항의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쳤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진실이 가려지거나 휘발된 건 아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에,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한 국민에 대한 부당한 권력행사’를 심문하는 물음은 계속될 것이다. 인권의 그늘은 중국의 굴기에 아킬레스건일 수밖에 없다.
 

[고(故)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



# 8년 만에 자유 찾은 아내 류샤, 중국은 왜 풀어줬나

류샤오보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 속에서 우린 머리를 삭발한 한 여인을 자주 만났다.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劉霞,1961- ). 류샤오보는 08선언으로 징역11년을 선고받는 자리의 최후진술에서 류샤에 대한 얘기를 했다. “지난 20년 동안 나의 가장 큰 행운은 아내의 희생적 사랑을 얻은 것이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3년간 류샤오보는 복역 중 결혼을 한 아내 류샤에게 3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류샤의 아버지는 중국 경제부문의 부부장급 고위간부였고 어머니는 국민당 간부의 딸로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여성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금융출판사와 국가세무국에서 근무를 한 뒤 직장을 나와 프리랜서 작가가 된다. 류샤오보를 알게 되는 것은 1982년 베이징의 문학모임에서였다. 둘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정부와 투쟁을 벌이면서 가까워진다. 원래 류샤오보에겐 아내가 있었지만, 남편의 시위활동과 투옥에 아내가 견디지 못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나가버렸다. 1996년 노동교화형을 받던 류샤오보는 류샤와 부부가 된다.

08헌장 투옥 이후 아내 류샤는 남편과 나라를 위한 투사로 변한다. 주위 사람들은 남편이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은 현대판 공자이며, 중국의 모세”라고 위로했지만, 분노와 슬픔은 류샤의 몫이었다. 컴퓨터와 휴대폰 사용법을 익히고 트위터를 활용해 남편의 수감과 중국의 인권을 비판했다. 이런 활동에 그녀도 가택연금 처분을 받는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류샤는 머리를 삭발했다. 끝도 없는 고독한 투쟁은 그녀에게 우울증을 안겨줬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가능한 한 이 평범하지 않은 날들을 평범한 날들처럼 보낼 거야. 온종일 하소연만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

2010년 그녀의 트위터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나는 정부의 불법 연금조치에 강력히 항의한다. 노르웨이 외교관들이 나를 돕기 위해 찾아왔는데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공안에 의해 제지당했다. 나는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식료품을 사러갈 때가 아니면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며, 외출 때는 공안이 따라붙어 언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얼마 전 개설한 트위터 계정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창구의 전부다.”

문학소녀 류샤는 류샤오보에게 ‘바람’이란 시를 써준다.

그대 운명은 바람과 같아
이리저리 나부끼며
구름 속에서 노닌다

나는 그대의 집이 되길 환상했지만
어떤 집을 꾸려야
그대를 잡아둘 수 있을까
벽은 그대를 질식시킬 거야

그대는 바람일 뿐, 바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여태껏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난 눈을 뜰 수 없고
바람이 가버리면 먼지만 가득하다

문학청년 류샤오보는 류샤에게 ‘밤과 여명’이란 시를 써준다.

혼자서 잠이 드는 밤
너무나 춥다
여명 전의 외로운 별은 더욱 무정하여
침대 머리에 오렌지빛 등불이 켜져 있어도
살을 에는 어둠은 의연히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그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


류샤는 남편이 타계한 지 1년 만에 중국을 떠나 10일 독일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했다. 가택연금을 당한 지 8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셈이다. 류샤는 류샤오보가 눈감은 뒤 외국 이주를 희망해왔고, 독일 정부가 그녀의 출국을 돕기 위해 물밑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5월 중국 방문 때 시진핑을 만난 자리에서 류샤의 석방을 요청했다. 시진핑은 대대적인 선전을 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 리커창 중국총리를 만났을 때도 메르켈은 중국 인권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지난주 중국의 당국자는 류샤에게 전화를 걸어, 출국을 할 수 있으니 여권을 받으러 오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자국에 온 류샤의 무기한 체류를 허가했다.

10일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류샤에게 작고한 남편을 대신해 상을 받으러 노르웨이로 오라고 초청했다. 류샤가 독일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다. 베리트 라이스 안데르센 위원장은 “위원회는 이미 지난해 류샤오보 사망 이후 류샤를 오슬로에 초청한 바 있다”고 말하고 “의심할 여지 없이 류샤가 류샤오보의 뒤를 이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회의 초청을 받아들일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노르웨이 한 언론(아프텐포스텐)은 “류샤의 건강이 좋지 않고 남동생의 중국 출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류샤가 독일 망명중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연어 수출 타격으로 곤경에 처했던 노르웨이 정부는, 이 뉴스에 오히려 간이 쫄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류샤는 이제 바람처럼 가버린 남편 류샤오보의 ‘진짜 집’이 되어 그를 지킬 수 있을까. 그의 1주기, 중국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