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개봉한 영화 ‘변산’ 역시 그렇다. 꼬일 대로 꼬인 순간, 친구 선미(김고은 분)의 꼼수로 고향 변산에 돌아오게 된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 분)가 피하고 싶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했다.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그리고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한 이들에게 “정면으로 돌파하라”는 권유와 응원은 그의 지난 작품이 그랬듯 연필로 정성껏 눌러 쓴 손편지처럼 친근하고 따스했다.
다음은 아주경제와 인터뷰를 가진 이준익 감독의 일문일답이다
-영화 ‘동주’, ‘박열’에 이어 ‘변산’으로 청춘 3부작이 완성됐다. 이번에도 ‘청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관심일까?
"그렇다. 나는 언제나 인물, 사람에 관심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은 하나하나의 가치를 부여받는 거다. 일반화하거나 통용화 시키는 건 잘 안 된다."
-이번 작품 속 인간 군상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개별적이라고 본다. 요즘은 개인주의도 인정받는 시대니까. 극 중 아버지도, 학수, 선미까지도 다 개별인 거다. 아버지가 아들 학수에게 ‘잘사는 것이 (나에 대한) 복수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탈무드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언젠가 읽고 깊이 감명받아 ‘꼭 영화에 한 번은 쓰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잘 어울려서 여기에 써먹게 된 거지. 용서해주는 이가 나중에도 용서받을 수 있는 거다. 자신은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타인에게 용서받길 바란다면 그건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다. 아버지는 학수에게, 학수는 선미에게 용서받고 잘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복수에 성공한 셈이다."
-‘라디오스타’와 ‘즐거운 인생’이 록으로 저항정신을 표현했다면, ‘변산’은 그 수단이 랩이 되었다.
"영화는 대중매체다. 대중을 담는 그릇이라는 거지. 젊은이들이 랩에 관심이 많으니 필연적으로 대중문화·영화에 쓰이는 거다. 단 랩이라는 장르는 미국이 원산지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다소 낯설다. 미국을 흉내 내며 의미부여를 한다고 해도 우리 현실과는 다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최첨단의 장르와 가장 컨트리한 장소를 어우러지게 하려고 했다. 가장 트렌디한 랩과 가장 컨트리한 변산을 통해 학수가 고향과 불편한 기억을 맞닥뜨린다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거기에 박정민이 직접 쓴 진솔한 자기 고백이 더해진다면 역설적으로 패러독스 코미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위험했지만 과감하게 모험하게 된 거다."
-래퍼인 주인공과 변산 주민들의 갈등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문제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세대 간의 갈등은 오랜 사회문제다.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향보다 갈증을 증폭시키는 사례들이 훨씬 더 많고 확산되는데 그렇다면 세대 간의 이해는 어디에서 시작되느냐다. 청춘이 아재를 이해하는 게 수월할까? 아니면 아재가 청춘을 이해하는 게 수월할까? 저는 후자라고 본다. 청춘은 아직 아재를 경험하지 못했으나, 아재는 청춘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청춘을 잊어버린 아재 혹은 꼰대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다면 ‘아, 랩이 저런 거였구나’ 이해하고 이해 면적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러 랩 가사 자막도 넣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리스닝이 잘 안 되거든."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은 이른바 ‘사람 냄새’ 나는 영화가 많았다. 그런데도 나름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미스터리·스릴러 장르 영화들은 그 장르만의 쾌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간 제가 찍은 건 장르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 다만 장르적 반복을 하는 건 스스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작품의 필모그래피를 책임져야 하는데, 장르 영화를 찍지 못하는 감독 입장에서 자기 영화와 충돌하는 건 피해야 하지 않겠나."
-커튼콜 장면도 인상 깊더라. 꽉 닫힌 해피엔딩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도였다. 행복하게 끝내고 싶었다. 엔딩 장면을 보면 학수와 선미가 짧게 뽀뽀하는 신이 있는데 그건 배우들의 애드리브였다. 배우들도 학수와 선미가 입 한번 맞추지 못하는 게 아쉬웠던 거지. 늘 두 사람은 뽀뽀하려다가 못했고 심지어 유사하게 한 것이 노을과 뽀뽀한 거니까.
-학수가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때리는데. 이 장면에서 나름 작은 논란(?)이 있었다.
"아버지를 어떻게 때릴 수 있느냐는 거다. 그러나 저는 학수가 아버지를 때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반대로 아버지가 학수에게 맞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계속 ‘컴온’, ‘쳐! 쳐보라고!’라고 자극하고 도발하는 것 아니겠나. ‘나를 밟고 넘어가 용대를 밟으라’는 것이 아버지의 의도였고 그 말인즉슨 ‘불편했던 과거를 극복하라’는 거지. 아버지가 학수의 독기를 끌어올렸다고 본다. 그래서 그다음 대사가 ‘펀치는 이만하면 됐다’ 아니겠나. 그 신은 학수가 아버지를 때린 게 아니라 꼰대가 청춘에게 때려달라는 주문 같은 신이다. 어떤 표상을 깨라는 거지. 가부장제가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 남아있는데 우리가 이 시대를, 가부장제의 표상을 넘어설 때가 되지 않았나."
-관객들이 ‘변산’을 어떻게 보았으면 좋겠나.
"감독으로서 나의 철학이 무엇이냐면, 영화는 관객의 것이라는 거다. 제가 어릴 때 본 만화영화는 내 가슴속에 남아있고 결국은 내 영화다. 찍을 때는 만드는 사람들의 것이지만 개봉하고 나면 시간 내서 영화를 보는 관객의 것이 되는 거다."
-다음 영화는 어떤 작품이 될까?
"준비 중인데 아직 결정하진 못했다. 빨리하려고 노력 중이긴 하는데. 하하하.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1년에 한 편씩 꾸준히 찍으려고 한다. 성실히 할 뿐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