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당장 오감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탐구한다. 자연과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작동원리를 연구하고, 사회과학은 인간이 구축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공부한다. 인문학과 예술은 인간 내면의 활동과 그 활동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숙고이며,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의미가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상상한다. 진리·착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는 가시적인 물건이나 사회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는 원칙들이다.
인간 상상력의 끝은 ‘사후세계’와 ‘신’이다. 우리는 죽음과 그 이후를 경험할 수 없다. 종종 사후세계를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 경험은 그 개인의 특수한 정황 안에서만 진리다. 그 경험자가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순간 거짓이 된다. 인류는 수십만년 전부터 사후세계를 상상해 진술함으로 자신들의 순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인문학이나 예술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대한 단상이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수한 대답을 유발한다. 독일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신은 당시 유럽의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모습대로 만들어내 교리로 치장한 그런 신이었다. 혹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자이지만 자신만의 신을 신봉하는 사람도 있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렇다. 그는 항상 ‘내면의 소리’를 듣는 종교적인 사람으로 소개한다. 신은 그에게 우주의 신비다. 신비 앞에서 그의 반응은 침묵과 경외다.
전지
파탄잘리는 신을 ‘이슈바라’라고 불렀다. 이슈바라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에 최선의 선택을 하는 주인’이란 뜻이다. 이슈바라는 요가 수련자가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I.25'에서 이슈바라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타트라 니라티샤얌 사르바즈나 비잠(tatra niratiśayaṁ sarvajña-bījam)" 이 문장을 직역하면 “이슈바라에서 (발견되는) 전지(全知)의 씨앗은 무궁무진하다”라는 뜻이다. 파탄잘리는 이슈바라를 명제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기술한다. 이슈바라의 가장 큰 특징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핵심을 깨달아 아는 능력이다. 바로 ‘전지'다. 전지는 요가 수련자가 획득해야 할 자신다운 자신, ‘참 나’를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심오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는 마라토너와 같다. 그는 최적의 성과를 내기 위해 4년 동안의 훈련과정을 훌륭하게 마쳐야 하고, 그 경주에 참가하는 다른 마라토너들의 장점과 단점, 자신이 뛰어야 할 코스의 지형과 기후 등 수많은 정보를 숙지해야 한다. 그런 총체적인 지식이 ‘전지’다. 유대교, 그리그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 종교는 ‘전지’를 중요한 신의 특성으로 설명한다. 힌두교, 불교, 그리고 자이나교에서 ‘전지’는 개인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자신의 멋진 삶을 위한 도구다.
파탄잘리는 ‘사르바즈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전지의 의미를 전달한다. ‘사르바’는 ‘모든’ 혹은 ‘완벽한’이란 뜻이다. ‘즈나’는 ‘즈냐나(jñāna)’의 줄임말로 ‘앎, 지식’이란 의미다. '바가바드기타'나 '우파니샤드' 같은 고대 인도의 힌두교 경전들에 자주 등장하는 산스크리트 단어다. 우파니샤드에서 즈냐나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참 나’이며 동시에 삼라만상을 운행하는 질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도록 마음을 활짝 연다. ‘앎’은 단순히 기억과 그 기능 이상이다. 우리는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한다. 만일 정보의 무궁무진한 양과 그것의 축적이라면 ‘구글’이 신이다. 이 정보들은 인간의 ‘치타(citta)'라고 불리는 마음의 저수지에 저장된다. 그러나 이 정보는 인간의 감정·인식·쾌감과 고통과 같은 다양한 감정들에 의해 ‘브리티’ 즉 ‘잡념(vritti)'이 된다.
앎은 기억의 기능이나 마음속에 저장된 수많은 정보들의 총체가 아니다. 앎은 저장된 수많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추려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여과기이다. 지식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오감과 자신의 욕망이라는 편견을 통해 얻는 지식인 ‘비즈냐나(vijñāna)'다. 비즈냐나는 관찰하려는 대상과 그 대상을 보려는 관찰자가 구분된 상태다. 그러나 파탄잘리가 언급한 즈냐나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삼매를 통해 ‘신비한 합일’을 이룰 때 숙성되는 지식이다.
인도·유럽어 어근 *gn-(그느)가 산스크리트어의 즈냐나가 됐고, 고대 그리스어로는 ‘그노시스(gnosis)'가 되었다. 그노시스는 헬레니즘 철학과 종교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용어다. 그노시스는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지식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몸과 정신으로 아는 지식이다. 예들 들어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다’라는 명제를 아는 것과 오랜 연습을 통해 운전할 줄 아는 지식을 모두 포함한다.
종자
이슈바라는 삼라만상의 현상과 그 숨겨진 원칙을 전부 알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다. 씨앗은 모든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요가수련자는 수련을 통해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이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수련이다. 농부가 과실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 완수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소유한 토양에 알맞은 품종을 정하고, 시기적절하게 씨를 뿌리고, 자연의 섭리대로 발아하기를 기다리며 인내(忍耐)한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자에겐 열매를 맺는 과실나무이며,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느티나무이며, 동물들이 뛰놀 수 있는 숲이다. 요가는 각자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행위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지식’이란 자신의 삶을 위한 최적의 씨앗을 선별하고 그 씨앗을 자신의 삶이라는 토양에 깊이 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는 품종을 선택하는 데 신중하지 않다. 자신이 우연히 태어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 부모의 성향, 사회과 국가의 이념,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자신에게 하나뿐인 고유한 삶의 씨앗을 결정한다. 각자의 삶에 고유한 나무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최고의 품종을 선택하기 위해 숙고해야 한다. 이 숙고가 바로 요가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 이슈바라를 찾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강요된 씨앗을 선택하는 행위가 ‘무식(無識)'이다. 농부는 자신의 땅을 살피고 다양한 품종을 심고 세월의 풍파를 견딤으로 그 땅에 어울리는 씨앗을 찾을 수 있다. 그 씨앗을 아는 능력이 바로 앎이며, 그 앎은 오랜 관찰과 경험이 낳은 자식이다.
내가 오늘 만개시킬 꽃은 내가 새벽에 심은 생각이라는 씨앗의 현상이다. 고대 히브리어에 ‘알다’라는 동사 ‘야다(yada)'가 있다. 야다는 동시에 ‘경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야다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단어다. 우리 말 표현에 ‘남자가 여자를 안다’라는 단어에도 그 의미가 숨어있다. ‘안다’라는 단어에는 어떤 사실을 객관적인 정보로 ‘기억한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무궁무진
요가는 자신의 삶이라는 나무을 심기 위한 최적의 품종을 선택하는 과정이며, 그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훈련이다. 그 씨앗은 외부와의 차단을 위해 자신의 외부를 단단한 껍질로 무장하여 그 안에 존재하는 ‘어린 눈’을 보호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주가 주는 햇빛과 비를 통해 씨앗이 발아할 것이다. 농부는 자신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파탄잘리는 그 가능성을 ‘니라티샤야(niratiśaya)', 즉 ‘무궁무진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에게 조언한다. 인생이라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자신에게 알맞은 품종을 선택하고, 그 씨앗이 발아하도록 인내하면서 가꾸라고. 그 결과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며 숭고하다. 신은 무궁무진한 지식을 소유한 씨앗이다. 그 씨앗을 소유한 자가 바로 신이다. 자신을 얽매고 있는 인연은 그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임(不稔)이다. 나는 지금 ‘전지’라는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 토양을 개간하고 있는가? 그 씨앗은 나의 손길과 솜씨를 통해 발아돼 열매를 맺을 것인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