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류덕환이 군 제대후 복귀작으로 선택한 것은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극본 문유석·연출 곽정환)였다. 이상주의 열혈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 분), 섣부른 선의보다 원리원칙이 최우선인 초엘리트 판사 임바른(김명수 분), 세상의 무게를 아는 현실주의 부장 판사 한세상(성동일 분) 등 달라도 너무 다른 세 명의 재판부가 펼치는 법정 드라마다.
이번 작품에서 류덕환은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43부 우배석판사 정보왕 역을 맡았다. 중앙지법의 최고 정보통으로 각종 인사 정보 및 남들 뒷얘기 전문가이자 엄청난 친화력으로 상대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통반장이다.
“인간적일 수 없는 구조의 군대” 안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지내왔던 류덕환은 제대 후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의 정보왕에게 끌렸다고. “가장 갈망했고 가장 필요하다”고 여겼던 부분을 ‘미스 함무라비’ 속, 정보왕이라는 인물을 통해 채우고 배운 셈이었다.
“제가 문과라서 수치로 따지는 건 잘 못 하는데…. 하하하. 제 안에도 분명 보왕이 같은 구석이 있겠죠? 문 작가님이 혼자 여러 명의 인물을 창조하다 보면 아주 세밀하고 미묘한 구석까지는 캐치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제가 애드리브로 메우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정보왕과 비슷한 부분이) 느껴지기도 해요. 즉석에서 그런 감정들이 나왔다는 건, 저와 완전히 별개의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 같아요.”
정보왕과 자신의 교집합을 떠올리던 류덕환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건 비슷한 것 같다”며, 연출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평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을 관찰하곤 해요. 지하철을 타고 갈 때 마주 앉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양이나 표정 같은 것들을 보면서 상상력을 펼치는데 이런 것들이 나중에는 제게 (연기할 때) 영감을 주기도 하거든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그 인물의 전사를 만드는데 그럴 때 특히 좋은 아이디어가 되죠.
류덕환의 관심은 곧 그의 재산이 되었다. ‘미스 함무라비’ 속, 정보왕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 특히 상대역인 이도연(이엘리야 분)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서사와 케미스트리는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처음엔 ‘이런 비주얼을 가진 친구와 파트너를 해도 괜찮을까?’ 걱정도 했어요. 너무 안 어울릴 것 같아서 다른 매력을 보여주면서, 우리 둘의 케미스트리를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류덕환은 이엘리야가 “확고하게 잡은” 도연 캐릭터를 두고, “조율하고 맞추기보다 상대의 호흡을 그대로 받아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도연의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레 보왕의 감정 역시 완성될 것이라” 여겼다.
“보왕이는 어디서든 떳떳하고 오지랖을 부리는 친구인데, 도연이 같은 당찬 여자를 만나며 당황하고 흐트러지게 돼요. 이런 모습들이 시청자로 하여금 호감을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도연이의 ‘말’을 계속 듣기로 했죠. 제가 연극 ‘에쿠우스’ 할 때 배운 건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었어요. 연출님이 제게 ‘덕환 씨 들으세요. 상대의 말을 들어주세요’라고 하시는데 이해를 못 했었거든요. 그러다 그 의미를 알게 됐고 제가 레벨 업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마음가짐의 문제였던 거죠. (이)엘리야와도 마찬가지였어요. 내 것만 잘하기 급급하기보다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의견을 전달하면서 진짜 감정이 만들어지게 되는 거예요.”
류덕환의 ‘마음가짐’은 상대 배우로 하여금 ‘치유’가 되기도 했다고. 앞서 드라마 ‘쌈마이워이’ 박서준과 수위 높은 키스신을 찍고 논란에 휩싸였던 이엘리야는 매체 인터뷰를 통해 “그 부분만 주목받아 마음고생을 했고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그런데 ‘미스 함무라비’ 류덕환을 통해 치유 받았다”며 상대 배우인 류덕환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취재진을 통해 이엘리야의 감사 인사를 전해 들은 류덕환은 “그런 이야기를 또 했느냐”며 멋쩍게 웃더니, “무한 신뢰해줘서 제가 더 고맙다”고 거들었다.
“평소에 도연이처럼 당차던 친구인데, 키스신을 앞두고서는 걱정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제게 ‘오빠 부담 안 되세요?’라고 묻기에 ‘왜? 너 무슨 사고쳤니?’하고 물을 정도였어요. 키스신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를 듣게 됐고, 반응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그의 모습에 제가 다 마음이 아팠어요. 그 친구에게 ‘이 장면은 도연이가 주도하는 키스신이니 네가 멋있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사전제작이니 마음대로 해보자. 그런 걸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죠. 키스신은 문제없이 잘 찍었어요.”
서로에 대한 응원과 신뢰는 차진 호흡으로 이어졌다. 김명수, 고아라와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 류덕환은 “대학 후배인 (고)아라와는 자연스럽게, 극 중 절친한 친구로 나오는 (김)명수와는 새로운 관계를 얻었다”며 뿌듯해했다.
“특히 명수는 이번 드라마로 가장 크게 얻은 동생이에요. 다른 분야에서 일하다 온 친구가 새로운 분야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자신감으로 잘 극복하더라고요. 자신이 어떤 걸 잘하는지도, 부족한 것도 명확히 알고 있죠. 부족한 걸 숨기려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되 발전하려고 해서 더 잘 될 수 있는 친구예요.”
극 중 정보왕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여러 관계와 사례를 통해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이에 류덕환 또한 ‘미스 함무라비’를 통해, 실제로 성장한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작품마다 얻는 게 분명 있죠.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배우와 무속인은 한 끗 차이’라고. 정말 어떤 날은 그 인물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접신 비슷한 걸 경험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오늘도 류덕환이 아닌 또 다른 모습을 겪었구나’ 생각하죠.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제가 아니라 캐릭터가 빛나는 것 같아서요. 정보왕도 그랬어요. ‘류덕환이 잘했다’가 아니라 ‘정보왕 매력 있더라’는 게 더 기분 좋아요. 그 역할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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