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業)으로 삼고 산다. 짧은 인생 동안 나에게 주어진 임무다. 공부(工夫)는 가르치는 일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 수련이며, 글을 쓰는 일은 공부한 성과를 대중에게 보시(普施)하려는 노력이다. 왜 나는 교수라는 직업을 갖게 됐는가? 그것은 시냇물에 떠내려가는 단풍잎과 같이 허송세월을 보내던 나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 한 교수 때문이다.
지금부터 30년 전 1988년 여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며칠 전에 구입한 1m 정도 높이의 이민 가방을 양손에 들고 김포공항에 서 있었다. 그전에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는 ‘촌부(村夫)'인 나는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날 참이었다. 이민 가방은 몇 권 전공서적과 원서들, 비닐봉지로 싼 김치와 밑반찬이 볼품없이 튕겨져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전에 미국사람과 5분 이상 이야기해본 적인 없지만 사지선다형 영어시험인 토플과 지알이(GRE) 시험을 운 좋게 잘 봐 높은 점수를 받았다. 9월 가을학기가 아직 시작하기 전 하버드대학 캠퍼스는 조용했다. 나는 ‘디비너티 홀(The Divinity Hall)'이라는 고색창연한 기숙사에서 홀로 20일 정도 지냈다. 유학생활을 시작하기 전 나의 시름은 점점 깊어갔다. 왜 나는 서울을 떠나 이곳 미국 케임브리지라는 도시의 으스스한 기숙사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가?
기숙사에서 만난 외국인들과 지내면서 한 교수에 대한 명성을 들었다. 셈족어를 가르치는 고전문헌학자 존 휴너가르드(John Huehnergard)라는 교수였다. 그가 전공한 학문은 그의 성 ‘휴너가르드’만큼 생소했다. 그는 바빌로니아 함무라비보다 아카드어를 더 잘 쓰고, 람세스보다 고대 이집트어를 더 잘 말하고, 다윗보다 히브리어 시를 더 잘 짓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저명한 학자였다. 나는 그 당시까지 내가 가야 할 삶의 길을 알려주고 격려해주는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만났던 선생들은 그저 나보다 먼저 태어난 글자 그대로 ‘선생(先生)'들 뿐이었다. 나는 휴너가르드 교수가 전공하는 분야를 알지 못했지만 그분이 하는 분야가 좋아 보여 무작정 면담을 신청했다.
10시간 같은 10분이 지나고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그는 물었다. “당신이 배 선생입니까?(Are you Mr. Bae?)" 누가 나를 ‘선생’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나는 나에게 존칭을 사용한 인간을 처음 만났다. 그의 연구실은 청결했고 책장에는 노아 홍수 이전에 만들어진 책 같은 고서 몇 권이 놓여 있었다. 휴너가르드는 물었다.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은 바로 핵심을 찔렀다. 나는 얼떨결에 말했다.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I want to be your student)." 그는 나의 한 문장을 통해 나의 영어실력, 나의 지적인 수준, 나의 개성과 성격까지 한 번에 알아차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알파벳도 잘 모르면서 셈족어를 전공하겠다고 말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덧셈, 뺄셈도 모르는 학생이 미적분을 먼저 공부하겠다고 말하는 허풍 같았을 것이다. 나의 얼굴은 화끈거렸다. 그리곤 몇 십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선문답
휴너가르드는 선문답(禪問答) 같은 두 가지 말을 해줬다. 1988년 9월 초 어느 날 신이 이 교수를 통해 내 머리에 번개를 친 것이다. 첫 번째 말은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시오(Show yourself)"다. 이 문장은 내 인생의 주문(呪文)이 됐다. 그가 보고싶은 것은 ‘내 자신’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가 물은 ‘당신 자신’이란 무엇인가? ‘자신(自身)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과거의 습관에 젖은 ‘수동적인 자신’과 자신이 ‘지금(只今)'을 통해 스스로에게 감동적인 자신을 만들려는 미래의 ‘즉흥적이며 능동적인 자신’이다. 과거의 자신에 안주하려는 성향은 게으름·편견·욕심이다. 파탄잘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미래의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하는 ‘잡념(雜念)'들이다. 잡념들은 과거의 진부한 자신에 만족한다. 이 잡념을 걷어내는 작업이 바로 요가다.
요가는 자신에게 감동적인 자신을 찾도록 촉구하는 스승이다. 휴너가르드가 보고 싶은 것은 ‘과거의 나’가 아니라, 그것과 과감히 결별하려는 현재와 미래의 ‘노력하는 나’였다. 나의 하루하루 수련이 요가의 목적지이며 동시에 목적지를 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징검다리가 된다. 그는 나에게 ‘당신 자신이 되십시오(Be yourself)'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보여 달라고’ 주문한다. ‘보여 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보여줄 수가 있는가? 어떻게 나는 ‘미래의 나’를 휴너가르드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자신에게 감동적인 것이 남에게도 감동적이다. 자신에게 아름다운 것이 남에게도 아름답다.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은 남에게도 리더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날 이후 기숙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힐레스 도서관(Hilles Library)'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 기숙사로 돌아오는 것을 내 삶의 원칙으로 만들었다.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나의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더 나은 내 자신을 만들려는 습관이 곧 실력이라는 사실을 후에 깨닫게 됐다.
두번째 말은 “운동한 후에, 시간 남으면 공부하십시오(Study after regular exercise!)"다. 휴너가르드는 공부하러 미국까지 온 학생에게 운동하라고 충고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휴너가르드는 학교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카알라일’이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등교하기도 하고 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십계명처럼 믿었다. 그리고 아침에 조깅을 시작했다. 학교 주변을 30~40분 뛴 후, 기숙사로 돌아와 찬물로 샤워하는 행위가 나에게 종교행위가 됐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치가 있기에 ‘달리기’는 나를 매일 변화시키는 스승이 됐다.
운동은 기억과 사고를 깊이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운동을 통해 나는 저녁에 깊이 잘 수 있고 잡념을 줄일 수 있었다. 휴너가르드의 가르침을 받아, 나는 지금도 일어나자마자 달린다. 아침 달리기는 나에게 태양과 같다. 나는 달리기를 하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 달리기와 더불어, 나는 운동을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항상 운동과 관련된 수업에 참여하여 몸의 변화를 관찰한다. 나는 휴너가르드로부터 운동하는 습관의 중요성을 배웠다. 1세기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orandum est u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 이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면 “당신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이다. 나는 자신의 몸을 잘 돌보는 사람만이 자신의 정신도 잘 돌보 수 있다고 믿는다.
구루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에서 ‘신’을 ‘이슈라바’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슈바라’는 ‘자신을 위한 가장 탁월한 선택을 하는 주인’이란 의미다. 요가를 수련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그 주인은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정황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 파탄잘리는 이슈바라를 스승이라고 '요가 수트라' I.26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 에샤 푸르베샴 아피 구루흐 칼레나 아나바체다트(sa eṣa pūrveṣām-api-guruḥ kālena-anavacchedāt)" 이 문장의 번역은 이렇다. “신(이슈바라)은 각자이면서 모든 존재다. 그는 시간에 의해 영향 받지 않기 때문에 고대 요가 수련자들도 역시 스승이다.”
파탄잘리는 고민했다. “이슈바라가 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파탄잘리는 요가에서 말하는 신인 이슈바라는 ‘스승’이라고 정의한다. 산스크리트어 ‘구루(gur)'란 단어는 ‘선생, 인도자, 전문가 혹은 스승’이란 의미다. ‘구루’는 영어로 편입돼 어떤 분야든 간에 최고 식견을 가진 자를 지칭한다. ‘구루’는 미몽에 빠져 헤매고 있는 자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내쫓는 빛과 같은 존재다. 특히 구루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원석을 발견하도록 촉구하고, 그 원석을 연마해 자신에게 감동적이고 타인에게 소중한 보석을 만들도록 안내하는 자다. 시카고 대학의 인도학자 머르치아 엘리야데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루는 오래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축적된 ‘형이상학적 공감’을 발현시키는 자다.
이슈바라는 몸에 지니고 있는 알 수 없는 매력인 ‘형이상학적 공감’을 요가 수련자에게 전달한다. 이슈바라는 요가 수련자들의 구루로, 태양과 같은 존재다. 태양은 태양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천체의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고 조절한다. 많은 행성들이 그 안에서 생겨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이 지나가면 사라진다. 태양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개별 영혼들인 ‘지바트마(jivatma)' 태양계의 운행원칙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태양계가 등장한 지난 50억년 동안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행성들, 특히 지구와 같이 행성에서 셀 수 없는 동식물의 소멸은 누가 관장했는가? 누가 인류의 스승들과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지혜를 주었는가? 이슈바라만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최초의 스승이었다. 파탄잘리는 구루로서 이슈바라의 특징을 시간(時間)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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