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영원한 청년 의사 윤봉길②] 성삼문의 선비정신, 어린 가슴에 불 지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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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8-0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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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인충절 흠모하던 고집쟁이 소년

[1900년대 초 서당 풍경]

매헌의 유년시절
매헌이 네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댁으로부터 시량리 139번지로 분가를 했다. 할아버지는 차남인 매헌의 아버지에게 작은 집과 약간의 농토와 가재도구를 챙겨 새 살림을 꾸리게 했다. 바로 이 집이 매헌이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오늘날의 ‘저한당’(抯韓堂)이다. 저한당은 ‘어려움에 처한 한국을 건져낸 집’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백부에게 한문을 배우다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깨우친 매헌이 6살이 될 무렵, 교육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김씨 부인은 자식 교육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아버지 윤황은 장남 매헌이 넉넉지 않은 가세(家勢)나마 물려받아 자신과 같이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당시 농촌 상황에서 글공부에 매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김씨 부인 생각은 달랐다. 매헌의 태몽이 예사롭지 않았고, 성장과정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비범함을 보아왔기에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이에 김씨 부인은 매헌의 큰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했다. 매헌은 큰집의 종형(從兄) 순의(舜儀)와 이민덕(본명 이산옥) 등 이웃집 아이들과 함께, 한문의 기초가 되는 천자문부터 배웠다. 하지만 매헌의 글공부에 대한 재능은 김씨 부인의 생각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워낙 성품이 급한 매헌은 천자문의 ‘넓을 洪을 널브 널브…바람 風을 바담풍 바담풍…’이라 더듬거려 학동들로부터 말더듬이라 놀림을 받았다. 마을사람들도 이런 매헌을 가리켜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아이’라고도 하였다. 내심 김씨 부인은 걱정이 많았다. 다만 매헌은 과제를 내주면 밤을 새서라도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답지 않은 진지함과 인내력에 위안이 되었다.
아이들의 놀림을 받다보니 매헌은 글공부에 대한 흥미를 점점 잃어가고 글방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쓰기가 일쑤였다. 김씨 부인은 이런 봉길을 혼내기보다는 다독이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낮엔 고된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손수 매헌에게 천자문 공부를 복습시키고, 새벽녘엔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아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부정확한 발음도 어머니의 노력으로 고치게 되었다.
천성(天性)적으로 활달하며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매헌의 성격을 잘 아는 김씨 부인은 칭찬과 책망을 적절히 조정하되, 아이를 위한 배려와 사랑을 잊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가르침 또한 준엄하면서도 자상하였다. 
김씨 부인의 지극한 정성과 노력, 큰아버지의 훈육에 힘입어 매헌은 점차 글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큰아버지는 일취월장 늘어가는 매헌의 실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때 김씨 부인은 매헌의 큰아버지로부터 “동접(同接, 함께 글을 배우는 학동) 들 중에 가장 총명하다”는 평판을 듣게 되자 한시름 놓고 뛸 듯이 기뻐했다. 천자문을 마칠 때에는 인근 마을사람들이 매헌을 재동이라고 불렀다.

 

[중수되기 전 윤봉길 의사 생가]


유년기 매헌의 기개
이 무렵 매헌은 ‘살가지’라고 불리었다. 성격이 남달리 굳세고, 승부근성이 대단하고, 야성적인 면모를 보여 ‘살쾡이 같다’고 마을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매헌은 이 시절 자신의 모습에 대해 <자서약력>(自書略歷)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7세에 사숙(私塾)에 취학하여 8,9동개(同介) 중에 총명하였으므로, 선생에게 찾아와 인리부로(隣里父老)들이 재동이라고 호명하였다. 그 반면에 또 하나의 별호(別號)는 ‘살가지’(狸)였다. 성질이 남달리 굳세고 조급하였으므로 동배(同輩)들과 다툼에 패한 적이 없었으며 혹은 접장한테 맞더라도 눈물 흘리며 울지 아니하고 되레 욕설을 하였으며 서당 규칙 위반으로 선생이 종아리를 치려고 옷을 걷으라 하면 두 눈을 크게 뜨고 말똥말똥 쳐다만 보았다.”
매헌의 종형인 윤순의(尹舜儀)는 매헌의 어린 시절에 대해 “나와는 한 살 터울이라 늘 같이 지냈는데, 내가 나이가 많았음에도 늘 지는 편이다. 고집과 완력이 보통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임전무퇴’의 성격이라… 도무지 물러서거나 남에게 지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회상했다.
큰아버지로부터 함께 글을 배운 매헌의 친구 이민덕(이산옥)은 “봉길은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다. 또 어쩌다 선생님한테 종아리라도 맞게 되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맞기만 했다. 그러나 절대로 굴복하는 일은 없었다. 또 책임감이 강한 그는 잘못된 일이 있으면 언제나 혼자 도맡아서 야단을 맞았다”라고 매헌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에게 큰 영향을 준 성삼문과 안중근.]


어린 매헌에게 영향을 준 의인충절(義人忠節)들
어린 시절 매헌은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로부터 우리나라를 빛낸 의인(義人)과 충성스런 절개를 지닌 위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충청남도 지역은 예로부터 충신과 독립운동가가 유별나게 많아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불리었다. 한창 감수성이 커갈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지조와 절개를 지킨 위인담은 어린 매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성삼문을 비롯해 안중근․전명운‧장인환 의사는 물론 최익현, 김좌진, 한용운 등 덕산 주변 지역 출신의 위인들의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매헌이 가장 존경한 사람은 인근 마을의 성삼문 선생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부귀영화도 마다하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조를 지킨 그분의 선비정신을 흠모했다. 스승 매곡 성주록 선생이 자신의 호에서 ‘매’자와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호에서 ‘헌’자를 따서 지어준 ‘매헌’이란 호를 자랑스럽게 여긴 것으로 미루어 그가 성삼문 선생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매헌이 존경한 또 한 분은 천도교 제4대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 선생이다. 춘암 선생과 매헌은 같은 마을 출신이다. 1855년 충남 덕산군 장촌면(현재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난 춘암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덕의대접주로 5만의 동학군을 통솔했다.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48인의 일원으로 참가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에도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지원하고, 1938년에는 전국 교인들이 일제히 멸왜(滅倭) 기도를 바치는 ‘무인(戊寅)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독립운동 자금모금을 주도하다 1940년 별세했다.
이밖에도 3․1운동 때 만족대표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 선생, 충남 홍성 출신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눈부신 활약상은 어린 매헌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또한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등의 이야기는 어린 또래들에게는 단골소재였다.
이렇듯 매헌의 유년시절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이는 그의 어머니 김씨 부인이었다. “신은 도처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들을 만들었다”는 유대 격언이 있듯이, 매헌에게 있어 어머니의 가르침과 사랑은 절대적이었으며 신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어린 가슴에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는 훗날 매헌이 가고자 하는 길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매헌은 홍성, 삽교 등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춘암 선생의 본을 받아, 재향시절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평등, 공생 공동체 건설을 추구했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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