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검인물전] 김종기 이사장, 잘나가는 샐러리맨에서 학교폭력 예방 수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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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진 기자
입력 2018-08-0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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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 명예 이사장[사진=연합뉴스]


7일 김종기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 명예 이사장이 지상파 방송에 출연했다. 그는 "방송에 나오기까지 쉽지 않았다. 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다"며 "직원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알려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삼성그룹에 입사해 관리와 수출 업무를 담당하고 비서실에도 몸담았다. 중견그룹 기조실장으로도 근무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는 샐러리맨이었다. 아들 대현이의 죽음이 김 이사장의 삶을 바꿨다.

1995년 6월 6일 대현이는 아파트 4층 자신의 방에서 뛰어내렸다. 차 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지만 다친 몸을 이끌고 한층 더 높이 올라가 재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현이의 방에는 '이젠 쉬고 싶다'는 쪽지가 남겨 있었다. 투신 이유는 학교폭력이었다.

김 이사장은 회사 업무로 베이징 출장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호텔 방이 무너지고 땅속으로 함몰되는 기분이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김 이사장은 아들을 떠나보내고서야 아들이 선배들에게 지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만 해도 학교폭력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시절이다.

그는 학교를 찾아가 학교폭력을 따졌지만, 학교 측은 "그런 일이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 대현이를 마음에 품은 몇 달 뒤 가해 학생들이 또 다른 학생을 상대로 폭력을 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 이사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학교폭력 피해자를 돕기 위한 청예단을 만들었다. 청예단의 처음 명칭은 '학교폭력예방재단'이었다. 하지만, 교육 당국에서 학교폭력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요구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으로 명칭을 바꿔야 했다. 당시 사회가 학교폭력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예단은 상근 직원 월급을 못 줄 만큼 재정난을 겪었다.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도 없는 상황에서 지원과 관심을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김 이사장은 학교폭력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97년이 돼서야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됐다. 2004년에는 학교폭력예방법이 만들어졌다. 청예단이 시민 47만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특별법 제정 청원을 한 게 큰 힘이 됐다.
 

학교폭력 피해 응답자 수[사진=교육부]

학교폭력은 꾸준히 감소했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7년 2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360만명의 학생 중 2만8000명(0.8%)이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2012년 32만1000명(8.5%) 피해 응답자보다 10%가량 줄었다.

수치가 줄었다고 학교폭력으로 피해 받는 학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김종기 이사장은 청예단 운영에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내가 하늘나라에서 대현이를 떳떳하게 보려면 학교폭력을 없애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상담 전화와 치유 프로그램, 강의 등으로 학교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힘쓰는 청예단이 안정적으로 운영돼 학생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

폭력은 재생산된다. 가정과 학교에서 가해진 폭력은 사회로 번지고 다음 세대로 대물림된다. 폭력은 토론과 다양성을 뭉개고 소수자와 약자를 비하하며 이것을 동력 삼아 사회를 움직인다. 이제 한국도 폭력의 굴레를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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