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은 우리의 생명창고
“농사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결코 묵은 문자가 아니다. 이 말은 억만 년이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사람이 먹고 사는 식량을 비롯하여 의복의 재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 생산에 기대지 않는 것이 없으니만큼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 안에 잡고 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의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이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농민독본> 제4과에 나오는 글로 매헌의 농촌에 대한 각별한 애착과 지극한 농민 사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매헌은 “깨끗한 흙으로부터 사람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 깨끗한 흙은 후세에 물려줄 최대의 자산이다. 흙에는 이치가 있고 그로부터 사람의 도리가 나온다”며 농민들에게 흙의 소중함을 통한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웠다. 일례로 자신의 이름을 쓸 때 봉(奉, 받들 봉)자에 이어, 길(吉)자는 선비사(士)가 아닌 흙토(土) 밑에 입구(口)를 붙여 ‘사람(口)은 흙(土)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옥편에도 없는 글자를 사용했을 정도로 매헌의 흙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이렇듯 매헌은 농촌은 ‘인류의 생명창고’라 여기며 농촌의 근간이며, 자산적 가치가 되는 흙을 통해 농민이 주가 되는 이상국가를 꿈꿨다. 이에 매헌은 농민을 위주로 한 정치․경제․문학․예술․교육이 되어야 함을 설파(說破)하며, 사회개혁을 통한 농촌부흥운동에 매진한 선구적(先驅的) 농민운동가였다.
농업협동조합운동의 효시, 목계농민회
1927년 3월, 매헌은 농촌부흥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청년모임인 ‘목계농민회’(沐溪農民會)를 조직했다. 뜻을 같이 하는 청년들이 각자 약간의 돈을 추렴하여, 마을 이름을 딴 ‘목계농민회’는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다섯 가지의 실천 사항(증산운동, 근검절약, 구매조합설립, 국산품애용운동, 부업장려운동)을 정해 일을 추진했다.
농민운동의 산실, 부흥원 건립
한편 목계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기존에 사용하던 야학당 공간은 너무 비좁았다. 매헌과 청년들은 농민운동본부인 회당을 건립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 명칭은 부흥원(復興院)으로 정했다. 문제는 건립에 필요한 땅과 자재 등 많은 자금 마련이었다. 모두들 걱정을 앞세우는데 매헌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니, 낙심부터 하지 말고 회당 지을 땅을 빌려 줄 사람부터 물색하자”며 여유가 넘쳤다. 그동안 무(無)에서 유(有)를 이뤄온 매헌의 낙천적 기질이 이때도 돋보였다.
일단 일을 시작하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동네 유지 윤주봉(尹柱鳳) 어른께서 땅을 희사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땅이 마련되자, 매헌을 비롯해 마을 청년 모두가 자재를 구하고, 자신의 솜씨를 힘껏 발휘했다. 마침내 1928년 3월 16일(음력 2월 25일) 12시 ‘목계농민회’의 본부이자 마을회관인 ‘부흥원’의 상량식을 갖고 얼마 후 완공하였다.
‘수내’와 ‘두레’ 통해 농촌부흥의 초석 다져
부흥원이 건립되자 ‘목계농민운동’에 탄력이 붙었다. 일단 매헌은 근검절약을 생활화하는 데 주력하며, 소득 증대를 위해 고구마 재배방법 개량 및 양잠․양계 등 부업을 권장했다. 생활필수품은 직접 생산공장에서 싸게 구입해 원가로 분배하고, 수확한 농산물을 수집하여 공동판매를 실시했다. 아울러 자립을 위한 자본이 부족한 농민들을 위해 ‘수내’와 ‘두레’ 제도를 실시했다.
‘수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민에게 피륙을 짤 옷감 두 필을 줘서 한 필은 받고, 한 필은 그 삯으로 주는 제도다. 매헌은 돈이 없어 돼지를 살 수 없는 농민에게 돼지를 자비로 사주고 기르게 해 새끼를 낳으면 그 절반은 기른 농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또다시 다른 농민에게 한 마리씩 주는 수내 제도를 실행, 농민의 경제적 자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매헌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향촌자치제의 핵심인 ‘두레’를 적극 활용해 공생공동체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흔히들 두레가 농가의 경작면적 단위로 노동력을 추렴하여 공동작업을 하는 관행으로만 알고 있다. 원래 두레정신은 마을 단위로 거주 농민 모두가 참여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지역공동체 제요소들을 결정해 나아가면서 조화롭게 수렴해 나가는 것이다.
매헌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이 두레를 통해서도 빛을 발했다. 두레가 오늘날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의 미래상이기도 하며, 목계농민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농업협동조합 운동의 효시로 이후 농촌부흥에 지렛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구국항쟁의 단초가 된 이흑룡과의 만남
부흥원 건립을 계기로 목계농민운동의 성과가 혁혁히 드러날 무렵, 매헌의 명성은 타지역으로까지 알려졌다. 그 무렵 낯선 사람이 매헌을 찾아왔다. 다부진 체구에 눈매는 매섭고, 눈빛은 광채가 빛나며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매헌의 활약상을 듣고 천안에서 온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랑방으로 청년을 안내한 매헌은 야학의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청년은 매헌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간혹 질문과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청년은 명함 한 장을 넌지시 매헌에게 내밀었다. 시조사 기자 이흑룡(李黑龍).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기독교 계통의 유서 깊은 잡지사 기자였다. 청년은 이야기를 통해 매헌이 큰 그릇임을 확인하곤 비로소 신분을 밝힌 것이다.
이흑룡은 아직 의아심이 가시지 않은 매헌에게 <시조> 잡지 몇 권을 주며, 자신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했다. 대한독립군 공작원으로, 전국의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를 포섭․조직을 하고, 적정 탐지와 군자금을 모아 보내는 일 등을 주로 한다고 했다.
매헌은 이흑룡을 통해 국내외 정세는 물론 구국(救國)을 위해 암약(暗躍)하는 많은 독립단체와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다. 농촌운동에만 전념하며, 신문과 잡지를 통해선 접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매헌으로서는 충격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매헌은 속으로 생각하며 마주앉은 이흑룡과 두 손을 맞잡았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민족의 앞날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후, 서로의 건투를 빌면서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 만남이 독립의 물꼬를 튼 상해의거로 발전될지는 매헌 자신도 몰랐다.
이흑룡과 헤어진 후, 매헌은 며칠 동안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과 상념에 빠져 잠을 못 이뤘다. 문맹퇴치와 농민운동에만 헌신해온 자신과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명을 담보하고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견주어 보는 등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렇듯 매헌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아는 지사로 성장했고, 조국을 위하여 목숨마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이흑룡과의 만남은 매헌 생애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전환점으로 우리 역사의 획을 긋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암울한 역사는 매헌을 농촌운동에만 몰두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일제 타도를 위한 구국항쟁이란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 조국 독립의 불꽃을 지핀 상해의거의 영웅으로 탄생케 했던 것이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사진=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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